“수시조정 동의절차 오래 걸려”
정부와 국회, 제도개선 나서야

장기수선계획은 공동주택의 장수명화를 위해 필수적이지만 과태료 수단으로 변질된 지 오래다. 당초 목적은 적절한 시기에 공동주택에서 시설 교체 및 보수가 이뤄지도록 유도하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현행 제도는 불명확한 기준, 복잡한 조정 절차, 장기수선충당금 적립금액의 부족, 공사비용의 주체 등의 문제로 얼룩져 있다. 

장기수선제도가 과태료의 샘이 된 이유는 장기수선충당금 항목의 모호한 기준 때문이다. 한국아파트신문이 주택관리사 11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89%가 장충금 항목을 확실하게 구분하기 어렵다고 답했다. 

국토교통부와 중앙공동주택관리지원센터가 만든 장기수선계획 실무가이드라인은 이론에 치우쳐 현장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탓에 되레 과태료의 근거가 됐다. 현장에서 실시하고자 하는 공사가 전면수선인지 부분수선인지 구분이 어렵다. 

가이드라인은 전면수선 최소단위를 설정하고 ‘공간적·기능적 독립성’을 고려해 구분한다고 말한다. ‘제품이 독립적으로 기능하면 하나의 제품 교체도 전면 수선’이라는 기능적 독립의 모호성으로 인해 현장에서는 CCTV나 화재 감지기 등의 공사가 어디에 속하는지 매번 고민할 수밖에 없다.

장기수선계획 수립기준 항목에 대한 주택관리사들의 불만도 적지 않다. 147개였던 장기수선 항목이 73개로 축소됐지만 아직도 너무 많다는 반응이다. 항목이 지나치게 세분화돼 업무의 효율성이 떨어지고 아파트 시설의 변화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지적이다. 

설문조사에서 85%의 주택관리사는 평소 수시조정 동의절차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응답했다. 빨리 진행해야 할 공사인데도 동의절차로 시간을 오래 끌게 돼 관리사무소장으로서 의욕을 잃게 된다고 한다. 당장 해야할 공사가 미뤄지면 입주민들의 불만이 속출하고 소장 자질 문제로까지 번진다. 일부 소장은 과태료 우려에도 수선유지비를 사용해야 할지 고민에 빠진다고 한다. 소액지출 한도를 정한 총론을 활용할 수 있지만 이것은 국토부가 고육지책으로 근거 법령 없이 유권해석을 해준 것일 뿐 근본적 해결책은 아니다.

장기수선제도는 1978년 주택건설촉진법 개정으로 처음 도입돼 50년에 육박하는 역사를 갖고 있다. 그런데도 건축, 개별 시설물, 관리, 법률 등 전문성을 갖춰 제도의 방향성을 제시할 ‘장기수선 전문가’나 전문기관은 없다. 현행 법률을 해석하고 컨설팅하는 전문가가 있을 뿐이다. 공동주택 전문가인 주택관리사는 법에 막혀 단지의 상황에 맞는 장기수선계획을 수립하기 어렵다. 

관리 전문가들은 “법적인 강제만 존재할 뿐 장기수선계획이 적절하게 수립, 시행되도록 알려주는 전문적 지원체계가 없어 문제”라고 지적한다. 일본의 경우 법규로 강제하지 않아도 장기수선계획이 치밀하게 정해져 있다. 사적 자치에 맡겨 “왜 가이드라인에 따르지 않았느냐”며 벌칙을 부여하지도 않는다. 입주민들도 관리주체를 믿고 관리비보다 많은 수선적립금(장기수선충당금)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대만은 우리와는 또 다른 모델을 갖고 있다. 건설사가 초기 장충금을 적립하도록 법으로 정하고 있는 것이다. 아파트를 지었으면 수리도 책임을 지라는 것이다. 건설비에 비례하는 장충금을 지자체에 납부해 긴급한 수선항목이 발생할 때 사용하도록 한다. 사용승인 절차 중 하나로 사업주체에 최초 장기수선계획 수립 의무만을 부여하는 우리나라와 비교되는 부분이다. 

공동주택 관리현장은 장기수선제도로 인한 어려움을 호소하고 제도개선을 요구하고 있지만 정부와 국회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관리현장에서 당장 반영돼야 한다고 강조하는 장기수선제도 개선 법안은 몇 년째 국회에서 잠자고 있고 곧 폐기될 처지다. 제도 개선을 외쳐봐야 헛수고이니 장기수선제도에 관한 세미나와 토론회도 2018년 이후 열리지 않고 있다. 국토부는 법에 규정된 ‘장충금 최소적립금 기준’ 고시를 지금껏 모른 척하고 있다. 국토부 담당자들 귀에는 장충금이 부족하다는 아우성이 들리지 않는 것 같다. 

한국형 장기수선제도가 현장에 안착하기 위해서는 지금과 같은 엄격한 규제나 제재만으로는 안 된다. 장기수선에 대한 꾸준한 연구, 국내외 사례 조사, 현장의 목소리 청취를 통해 공동주택의 미래를 가꿔갈 제도를 만들어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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