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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유리(流離)’의 첫 문단은 이렇게 시작한다. “세 살이 되었을 때 나는 읽을 줄 알았고, 다섯 살이 되었을 때 갖가지 악기의 소리를 들었으며, 그것들의 감미와 슬픔을 나는 온몸으로 이해했다. 일곱 살이 되었을 때 내 머리맡엔 열 줄(段)의 책꽂이가 놓여 있었고 나는 그곳의 책들을 틀린 데 없이 읽고 썼다. 열세 살이 되었을 때 서가는 몇 배로 늘어났고, 나는 말재간으로 사람들을 자유자재로 웃기고 울릴 줄 알았다. 사람들은 내 혀가 유난히 길다고 말했다. 그리고 열일곱이 되었을 때 나는 마침내 또렷이 보았다. 내가 본 그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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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원(金途遠)
호수 1222
2021.06.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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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혜의 신비로운 자태를 고이 간직하고 태백준령 산간계곡의 바람과 구름이 만들어진 참이슬이 모여서 한반도의 젖줄이 돼 흘러내리는 아름다운 동강이 있는 곳, 옛 조상들의 삶의 숨소리가 곳곳에 스며 있는 영월은 조선시대 비운의 임금 단종의 애달픈 사연이 곳곳에 남아 있고 고뇌와 번민으로 죽장망혜(竹杖芒鞋)에 모든 시름을 짊어지고 살아간 풍류객이자 천재시인인 난고 김병연 선생의 삶의 체취가 배어 있는 충절과 문향의 고장이다.◈청령포청령포는 강원도 영월군 남면 광천리 산 67-1에 소재해 있으며 왕위를 빼앗기고 영월로 유배된 단종이 머무르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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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수
호수 998
2016.10.26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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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리산 사실기비(事實記碑)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67호로 지정됐으며 보은군 속리산면 사내리에 자리하고 있다. 이 비석은 속리산의 내역을 기록한 것으로 현종 7년(1666)에 송시열이 짓고 송길준이 써서 법주사 입구에 세웠다.내용은 속리산이 명산임과 세조가 이곳에 행차한 사실 등을 기록하고 있다. 특히 수정봉 마루에 있는 거북바위에 대해서는 머리를 서쪽으로 두고 있는데 중국인들이 중국의 재물이 우리나라로 들어온다고 해 그 머리를 자르고 거북이 등에 10층의 탑을 세웠다고 한다. 이것을 효종 4년(1653)에 옥천 군수 이두양이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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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수
호수 990
2016.08.24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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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이 미리 알아낸 세 가지 일제27대 덕만(德曼)의 시호는 선덕여왕이며 성은 김씨이고 아버지는 진평왕이다. 정관(貞觀, 당나라 태종의 연호) 6년 임진년(632)에 왕위에 올라 16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는데 여왕은 미리 안 세 가지가 있었다.첫 번째는 당 태종이 붉은색, 자주색, 흰색의 세 가지 색깔로 그린 모란그림과 그 씨를 보내왔는데 그 그림을 보고 왕이 말했다. “이 꽃은 향기가 없을 것이다” 시를 뜰에 심었더니 마침내 꽃이 피었다. 그러나 꽃이 떨어질 때까지도 과연 선덕여왕의 말대로 꽃에 향기가 없었다.두 번째는 영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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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수
호수 930
2015.05.20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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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월성(月城)사적 제16호로 등록돼 있으며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 387-1에 소재해 있는 이 곳은 신라시대 궁궐이었던 곳이다. 지형이 초승달처럼 생겼다고 해 신월성 또는 월성이라 불렀으며 임금이 사는 성이라 해 재성(在城)이라고도 했다. 조선시대부터 반월성이라 불러 오늘에 이른다.잡초만 무성한 궁궐 뜰을 거닐며 생각해본다. 그 시절 내가 신라의 백성이었다면 무엇을 생각하며 이 궁궐을 바라봤을까? 어느 시대나 다 마찬가지겠지만 위정자와 백성들의 생각과 생각은 다르기 마련이고 그래서 요즘 흔히 하는 말로 소통이 중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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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수
호수 924
2015.04.07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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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역사상이 두 구의 금강역사상는 본래 분황사 동쪽 도로 건너편 구황동 절터에 있었고 1915년 경주박물관으로 옮겨왔다. 이 절터에는 지금도 석탑 지붕돌, 주춧돌과 함께 네 구의 금강역사상이 남아 있다. 또 이 절터에서 분황사 모전석탑과 같은 안산암으로 만든 벽돌 모양 석재 등이 발견돼 이 절터에도 분황사처럼 모전석탑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아마 이 금강역사들도 분황사 모전석탑처럼 구황동 절터 모전석탑 감실 입구 좌우에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금강역사는 불교가 성립된 이후 부처님과 그 가르침을 지키는 수호자의 역할을 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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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수
호수 922
2015.03.25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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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의 날이 선 긴 칼도, 적을 섬멸시킨다는 학익진도, 어쩔 수 없었나보다.제주의 유채를 물들이며 질풍노도로 한려수도 청정해역의 절경 사이를 뚫는 봄바람은 한산도의 동백을 담금질하여 기어이 빨갛게 물들이고 말았다.봄맞이 나그네는 멀리 더 멀리서 올라오는 봄의 발자국을 마중하기 위해 통영대교를 지나 산양일주도로를 달려 지금 연대도와 만지도를 잇는 출렁다리 위에 서 있다. 을미년 1월에 개통한 출렁다리는 13억여 원이 들은 현수교란다. 탄소배출 제로섬인 에코아일랜드를 잇는 출렁다리는 사람만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바람도, 햇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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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수
호수 922
2015.03.25 1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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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양의 을미년에는 햇살 같은 악수와 향기로운 박수가 많았으면 좋겠다. 어느 시대이고 시련이 없겠냐만 시련 없이 명검은 날이 서지 않는다고 했다.악수하고 박수치면 저절로 우리 몸에는 물기도 많아 항암이 된다.지금 4,400개의 요양원에서 찾아오는 사람이 없어 악수도 못하고, 본정신이 없어 박수를 못 치는 사람들이 많다.결혼예식장에서 금방 ‘윤서방’이라고 했는데 돌아서면 누구냐고 묻고 또 누구냐고 묻는 당신은 나의 슬픈 처이모님이어라. 자기 손자 녀석이 결혼을 하는데도 누구 결혼이냐고 묻고 또 묻는 서러움이여.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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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용수
호수 921
2015.03.18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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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조약사불 좌상 경주 남산 용장골에서 출토했으며 통일신라 8세기 말~9세기 초의 석불로 추정하고 있다. 모든 질병뿐만 아니라 무지의 병까지도 고쳐준다는 부처인 약사불이다. 왼손에 약단지를 쥐고 있는 것으로 약사불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처음 박물관으로 옮겼을 때에는 머리와 몸체가 떨어져 있었는데 1975년에 복원했다. 그런데 약단지를 빼면 석불암 본존물과 비슷하다. 오른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는 모습인 항마촉지인,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모습(편단우견) 등이 석굴암 본존불과 닮았다. 석굴암 본존불이 만들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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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수
호수 921
2015.03.18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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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수는 만남의 기쁨이요, 박수는 축하의 기쁨이다. 내가 나의 손을 내밀어 악수를 하고 내가 나의 두 손바닥을 부딪쳐 소리를 내는 것이 박수라면 악수와 박수는 돈을 들이지 않고 남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도 나에게도 너에게도 커다란 행복이다. 박수는 건강에도 좋다고 보약 중의 보약이라고 한다. 억지로라도 박수만 열심히 자주 치면 3년은 오래 살고, 억지로라도 자주 웃기만 해도 또 3년은 오래 산다고 한다.박수는 웃음을 동반한다. 한번 크게 웃으면 우리 몸에 있는 650개의 근육 중 231개가 움직이고 스트레스로 인한 질병 280가지가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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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용수
호수 920
2015.03.11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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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 지난 호에 이어지금은 중단됐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에밀레종은 새벽을 알리는 종소리로 매일 아침 여섯시에 세 번 타종됐다고 한다. 이 종이 만들어진 771년 12월 14일 이후 그것이 종각에 걸려 있는 한 변함없이 서라벌에 울려 퍼진 종소리였다.에밀레종에는 총 1,037자의 명문이 새겨져 있어 이 종의 제작 시기, 동기, 의미 등을 소상히 밝히고 종을 만드는데 참여한 8명의 이름과 관직, 주종기술자 4명의 직책과 이름을 모두 기록해놨다. ‘한림랑 김필중이 왕명을 받들어짓다’로 시작하는 이 명문은 앞머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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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수
호수 920
2015.03.11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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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수는 장황한 산문시가 아니라 단 한 줄로 가슴에 울림을 주는 극서정시다. 살다보면 미움도 원망도 많고 재수 없는 날도, 운수 나쁜 날도 많다. 상처를 받은 사람도, 상처를 준 사람도 마음이 아플 때가 많다. 마음이 아프고 결릴 때는 한 장의 파스를 붙일 장소도 찾기가 힘이 든다. 그래서 악수는 영혼의 담금질이다. 가급적 살아 있는 동안 악수를 많이 하여 심장박동수를 고르게 하는 것이 밤에 잠이 잘 오는 지혜일지도 모른다. 살다가 힘이 들 때 손을 잡아주고 악수를 할 사람이 있으면 성공이다.출입문에 누구에게나 거부하지 않는 손잡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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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용수
호수 919
2015.03.04 1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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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92년간 신라의 서울이었던 천년수도. 예로부터 ‘서라벌’이라고 불려온 경주의 역사는 곧 천년왕국 신라의 역사다. 불교와 과학, 신라인의 예술이 꽃 피운 가장 찬란했던 고대문화와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케 해준 화랑도의 높은 기상, 이 모든 것들이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역사와 문화의 고장 경주는 인류가 함께 보존해야 할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의 도시다.천년을 흐르는 신라의 푸른 숨결 ‘지붕 없는 박물관’인 경주를 제대로 답사하려는 한 달도 턱없이 모자랄 것이다. 그만큼 처처가 문화 유물 자체일 정도로 곳곳에 산재해 있는 문화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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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수
호수 919
2015.03.04 16: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