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티아고 순례길을 완주한 다음 날 버스를 타고 대서양과 맞닿아있는 피스테라(Fisterra)와 묵시아(Muxia)에 다녀왔다. 피스테라라는 이름은 갈리시아어로 '땅끝'이라는 의미다. 스페인어로는 피니스테레(Finisterre)라고 한다. 산티아고까지 걸어온 순례자 중 일부는 피스테라까지 걷는다. 산티아고에서 사나흘 정도 더 걸어야 한다. 산티아고에서 본 ‘남은 거리 0km’ 표지석이 피스테라와 묵시아에도 세워져 있다.피스테라는 성인의 발자취가 느껴지는 곳이기도 하다. 야고보 성인이 이곳에 살던 켈트인들에게 기독교를 전한 일화가 남아 있다. 야고보 성인이 예루살렘에서 순교하신 후 제자들에 의해 유해가 수습되고 배에 실려 피스테라에 닿았다고 한다. 이른 아침 산티아고에서 피스테라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비가 부슬부슬 왔다. 오늘도 다니면서 비 좀 맞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출발한 지 얼마 안 돼서 해가 나고 맑아졌다.피스테라와 묵시아는 대서양에 접해있어 바람이 세기로 유명하다. 그런데 오늘은 바람도 잠잠했다. 하늘이 순례자들을 돕는다고 생각했다. 좋은 날씨 덕분에 성인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느낄 수 있었다. 피스테라에는 순례자들이 자신의 신발이나 옷가지를
산티아고, 나를 비우는 길
최광락
호수 1272
2022.06.27 14:54
-
엊저녁 몬테 도 고조에서는 축제가 열렸다. 밤새 울려 퍼지는 음악 소리에 잠을 설쳤다. 아침에 나가보니 근처 공원 주변은 버려진 술병들로 어지러웠다. 산티아고에서도 지난밤 축제가 있었다고 한다. 비 오는 음울한 날씨에 사람들 기운을 올려보자는 뜻이 아닌가 싶다.아침에 매번 일찍 서두르다가 오늘 천천히 나오려니 오히려 어색했다. 천천히 걸어도 목적지까지 한 시간 남짓 걸으면 도착하니 일찍 나올 필요가 없었다. 표지판을 보고 여유 있게 걷다가 문을 연 카페에서 간단히 아침 식사를 해결했다.카페를 나와 가벼운 발걸음으로 목적지를 향해 걸었다. 얼마 안 가 드디어 멀리 산티아고 대성당 종탑이 보였다.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냥 담담했다. 그간 나의 마음의 거의 전부를 차지했던 순례의 상징과도 같은 대성당도 여느 도시에서 본 성당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됐다. 성당 앞에 도착해 시계를 보니 오전 9시 17분이었다. 이 시각이 최종 도착 시간이다. 성당 앞에서 사진을 찍은 뒤 순례 확인서를 발급하는 순례자사무실에 갔다. 거기서 그동안 같이 걷던 사람들을 다시 만났다. 프랑스의 생장 피에드 포트(Saint-Jean-Pied-de-Port)에서
산티아고, 나를 비우는 길
최광락
호수 1271
2022.06.25 18:32
-
산티아고 순례길 중 가장 유명한 루트인 프랑스 길과 또 다른 순례 루트인 북쪽 길이 만나는 도시가 바로 아르주아다. 두 길이 아르주아에서 만나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 이어진다. 강물이 모이듯 사람들이 모인다. 그래서 더 의미가 큰 도시다.어제 묵었던 아르주아의 알베르게에서 북쪽 길을 따라 걸었다는 독일인 순례자를 만났다. 그는 “북쪽 길은 산길이 많아 길의 기복이 심하지만, 풍광이 빼어나다”며 나에게 꼭 가보라고 권했다. 그와 얘기를 나누던 사이 포르투갈인 순례자 한 무리가 들어왔다. 그중 70대의 한 순례자는 내가 한국인인 것을 알고는 자신이 남한과 북한을 모두 여행했다고 자랑했다. 그가 전 세계를 다닌 기록을 보여줬는데 대단했다. 특히 순례길을 다양한 경로로 여러 번 걸었다는 게 부러웠다. 오늘은 아르주아를 출발해 산티아고의 코 밑인 몬테 도 고조(Monte do Gozo)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여기까지 35km의 여정이었다. 최근 가장 긴 거리를 걸었다. 산티아고에 약 5km 못 미쳐 위치한 마을에서 멈춘 이유는 옛 순례자들이 산티아고로 들어가기 전 기쁨의 탄성을 올린 곳이기 때문이다. 긴 순례 끝에 이 동네에 다다른 옛 순례자들이 산티아고를 먼발치
산티아고, 나를 비우는 길
최광락
호수 1271
2022.06.24 18:07
-
오전 5시에 알베르게를 나섰다. 가로등 불빛이 내가 갈 길을 안내했다. 새벽의 상쾌한 공기를 마시며 걷던 중 순례자 한 명이 나를 앞질러 갔다. 그를 벗 삼아 함께 걸었다. 시골 마을을 굽이굽이 돌듯이 걸었다. 팔라스 데 레이를 벗어나 얼마 가지 않아 멜리데(Melide)에 도착했다. 멜리데는 뿔뽀라는 요리로 유명하다. 갈리시아 지방의 별미인 문어 요리다. 이틀 전 포르토마린 식당에서 ‘오늘의 순례자 요리’로 나와 먹어 본 적이 있다. 뽈뽀는 문어를 살짝 삶아 올리브유, 소금으로 간을 한 뒤 넓게 썬 감자와 함께 먹는 요리다. 문어를 빨간 양념에 버무린 음식이라 맵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먹어보니 괜찮았다. 빨간 양념의 정체는 고춧가루가 아니라 파프리카 가루였다. 함께 식사한 이탈리아인 친구는 자기 고향에선 파프리카 대신 레몬즙을 뿌려 먹는다고 말했다. 고춧가루에 익숙한 우리에게는 별것 아닌데 그 친구는 맵다고 말했다. 멜리데를 지나 한참 숲길을 오르내렸다. 가다가 철의 십자가에서 만난 프랑스인 부부를 다시 만났다. 어찌나 반갑던지, 한참이나 서로의 안부를 묻고 사진도 찍어 교환했다.걷고 또 걸어 오후 1시쯤 오늘의 목적지인 아르주아(Arzua)에 도착했다. 오
산티아고, 나를 비우는 길
최광락
호수 1271
2022.06.23 16:53
-
깜깜한 새벽에 숙소를 나섰다. 어느 길로 가야 하는지 몰라 잠깐 망설이는데 몇몇 순례자들이 어둠 속을 향해 우르르 앞서갔다. 거침없이 걸어가는 모습을 보고 길을 잘 안다고 생각해 그들의 뒤를 따라갔다. 깜깜한 숲 터널로 들어섰더니 끝이 보이지 않았다. 두려움을 느꼈다. 마음속으로 터널 끝이 밝아질 것을 기대하며 계속 걸었다. 살아오면서 끝없는 터널 속을 걸어간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그렇지만 포기하지 않고 가다 보면 끝이 있고, 그 끝엔 빛이 기다리고 있었다.오늘의 일정 초반 한 시간 정도는 가파른 오르막을 올라갔다. 고도 350m 지점에서 720m 정도 높이까지 오른 것 같다. 지치고 숨이 차 중간에서 쉬고 있는 순례자를 보기도 했다. 언덕의 가장 높은 지점을 지난 이후로는 내리막길이 이어졌다. 도로 옆으로 나 있는 길도 상태가 좋아 걷기 수월했다.목적지를 향해 가던 중 물집으로 고생한 한국의 젊은이를 포함해 또 다른 한국인 순례자를 만났다. 그가 내 뒤에서 걸어오고 있으려니 생각했는데 나를 앞질러 걷고 있었다. 젊은이의 역량에 새삼 놀랐다. 오늘도 역시 하늘이 흐렸다. 어제 포르토마린에서 저녁 미사를 마치고 약국 전광판을 확인했을 때 기온
산티아고, 나를 비우는 길
최광락
호수 1271
2022.06.22 19:08
-
오늘도 이른 아침에 숙소를 나섰다. 사리아에서 순례길로 향하는 길에 산타 마리아 성당을 지나쳤다. 성당 앞에는 꽃잎과 나뭇잎으로 만든 장식이 바닥에 깔려있었다. 마을 행사가 있었나 보다. 평소 오전 6시면 훤하던 하늘이 흐리다. 사리아를 빠져나와 공동묘지 옆을 돌아 숲으로 만들어진 터널로 들어갔다. 해가 뜨기 전이라 숲 터널 안은 깜깜해서 조심히 걸었다. 그래도 끝은 있겠지 하며 걷다 보니 굽이굽이 산길이 나타났다. 사리아 근처는 산악지역이다. 흐린 날이 많아 일조량도 적은 듯했다. 그러다 보니 곡식 농사보다는 소나 돼지 등을 키우는 목축업이 주가 된 것 같다. 넓은 들판 한쪽에 집들이 모여 있다. 가축이 많은 만큼 축사도 많이 보였다. 빈집들도 많고 도시인의 별장 같은 곳들도 보였다. 갈리시아 주에 들어서면서 특이한 구조물을 봤다. 기둥 위에 올려진 작은 창고처럼 보이는 건물이었다. 알고 보니 곡식 저장고였다. 쥐나 해충이 올라가지 못하도록 기둥 위에 저장고를 올려둔 것이다. 높이 있다 보니 통풍도 잘 될 것이다. 저장고 안에는 옥수수 등이 있었다. 이런저런 풍경을 감상하며 걸었다. 거뭇한 구름이 흘러가며 비를 뿌리는 것이 소방헬기가 물을 뿌리는 것처럼 보
산티아고, 나를 비우는 길
최광락
호수 1271
2022.06.21 14:22
-
지난밤 트리아카스텔라의 숙소에서 함께 길을 걸었던 이탈리아인 친구 둘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한 친구는 컴퓨터 관련 일을 하다가 4년 전에 은퇴하고 여기저기를 여행하는 중이라고 했다. 그는 한국에 관심이 있어서 한번 와보고 싶다고 말했다. 또 다른 친구는 실업계 학교 보조교사를 하다 은퇴했다고 말했다. 둘 다 이탈리아 북부의 알프스 근처에 산다고 한다. 아주 유쾌하고 붙임성이 좋아 농담도 잘 건넨다. 스페인이나 이탈리아 같은 남부 유럽인들은 활달하고 붙임성이 좋아 말을 하기 편하다. 반면에 중북부 유럽인들은 대체로 타인을 대할 때 예의를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그들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창밖을 보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천둥소리도 함께 들려왔다. 아침에 길을 나서기 어렵지 않겠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출발 전 그쳤다. 비가 오고 난 뒤라 그런지 공기가 맑아 기분이 상쾌했다. 그동안 먼지에 시달렸던 내 폐에 보상이 된 듯했다. 길도 적당히 젖어 먼지 하나 흩날리지 않고 숲길을 걸었다. 하지만 날씨는 계속 흐렸다. 찬 바람까지 불었다. 보온을 위해 바람막이를 꺼내 입었다. 처음 순례길에 올라 레온까지는 햇살이 강하고 뜨겁기만 하더니 갈리시아에 들어서자
산티아고, 나를 비우는 길
최광락
호수 1271
2022.06.20 20:56
-
산길을 걷는 것은 상쾌하다. 며칠 동안 산길을 걸으며 덥지도 않고 맑은 공기를 맡으며 걸으니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다만, 어젯밤 숙소에서 코를 심하게 고는 사람 때문에 잠을 설친 것은 예외였다.사실 어제 프랑스인 친구와 같은 방에서 잠을 잔다는 것이 걱정됐다. 그가 자신은 잘 때 코를 심하게 곤다고 일러줬기 때문이다. 걱정은 빗나가지 않았다. 새벽 1시쯤 누군가의 코 고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어제 산을 오르느라 피곤했나보다 하고 이해는 했지만 자는 데 방해가 되니 짜증도 났다.그런데 새벽 4시쯤에 프랑스인 친구가 벌떡 일어나더니 황급히 방에서 나가는 것이 아닌가. 이제 좀 편하게 잘 수 있겠다 싶었는데 반전이 있었다. 프랑스인 친구가 코를 곤 것이 아니라 그의 옆에서 자던 모르는 사람이 코를 골았다. 프랑스인 친구도 그 소리에 참지 못하고 새벽에 나가버린 것이었다. 어제 선입견을 버리자고 해놓고 엉뚱한 사람을 비난하고 있었다는 생각에 속으로 굉장히 미안했다. 만나서 미안하다고 얘기해주고 싶었다. 한바탕 코골이 소동을 겪고 아침 일찍 숙소를 나섰다. 산 위에 있는 마을인 오 세브레이로부터는 내리막길이 이어질 줄 알았는데 계속 오르막으로 치닫는다. 그래도
산티아고, 나를 비우는 길
최광락
호수 1270
2022.06.19 18:49
-
어제 늦은 밤에 비야프랑카에도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소나기가 쏟아졌다. 낮 기온이 37도까지 올라가더니 그에 대한 반작용이었던 것 같다. 그제 밤 폰페라다에서 봤던 것과 비슷했다. 시끄러운 천둥소리에 잠을 자기 힘들었지만 시원한 바람이 불어 좋았다. 오늘 아침에는 약간 흐린 날씨라 걷기에 적당했다. 마을을 빠져나와 얼마 안 가 한적한 도로의 갓길을 걸었다. 차가 자주 다니지 않아 도로의 포장이 갈라지고 관리가 안 돼 있었다. 하지만 순례자에게는 소중한 길이다. 소용이 없어졌어도 누군가에게 소중한 존재인 것은 길이나 사람이나 마찬가지다. 한참을 걷다 보니 점점 산중으로 들어갔다. 계곡을 따라 들어가니 시원했다. 산속이지만 자연 풍광이 좋은 곳이고 평지보다 시원해서인지 휴양 마을이 있었다. 도시인들이 쉴 수 있도록 호텔과 식당이 곳곳에 있다. 산길에 접어들고 오르막을 계속해서 오르니 숨이 찼다. 그 길을 산악자전거를 탄 사람들이 줄을 지어 올라갔다. 힘들면 내려서 끌고서라도 갔다. 자전거로 산티아고 순례길을 오는 사람들도 많이 보인다. 스페인 사람들은 유난히 운동하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 걷기, 뛰기, 자전거 타기 등 다양한 운동을 즐기는 사람들도 많이 보인다.
산티아고, 나를 비우는 길
최광락
호수 1270
2022.06.18 19:08
-
엊저녁 폰페라다에는 폭풍우가 몰아쳤다. 천둥, 번개와 함께 바람이 세차게 불고 빗방울이 떨어졌다. 하지만 낮의 열기에 지친 내겐 시원한 밤이었다. 아침에 숙소를 나서 공원을 지나가는데 바람에 떨어진 나뭇가지들로 주변이 어지러웠다. 그러고 보니 이곳 집 외부 창문을 단단한 블라인드나 나무 덮개로 닫아놓은 것이 이해가 갔다. 한동안 도시 옆으로 난 길을 따라 걸었다. 잠시 뒤 포도밭으로 가득한 전원이 펼쳐졌다. 라리오하 이후 포도밭이 드물었는데, 푸른 포도밭을 보니 다시 마음이 상쾌해졌다. 생각보다 포도알이 굵다. 일찍 익는 조생종인지, 아니면 내가 걷는 사이 그만큼 자랐는지 모르겠다. 한참을 더 걸어 산중도시 비야프랑카 델 비에르소(Villafranca del Bierzo)에 도착했다. 총 23km를 걸었다. 이 마을은 분지에 있어 멀리 떨어진 곳에서 봤을 때 성당 종탑 두 개만 겨우 보였다. 그러다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배우 유해진과 차승원 등이 알베르게를 운영하는 예능 프로그램 ‘스페인 하숙’을 촬영한 마을이다. 숙소를 정하고 돌아보니 작지만 예쁜 마을이다. 어제 오후부터 함께 걷던 한국인 순례자들을 뒤로 하고 혼자 걷게 됐다. 그들은 무리해서 일정을 강
산티아고, 나를 비우는 길
최광락
호수 1270
2022.06.17 17:44
-
오늘은 목적지인 폰페라다(Ponferrada)로 가기 위해 해발 1504m의 산을 넘어야 한다. 어제 묵었던 폰세바돈은 산 정상보다는 아래쪽에 위치해 어렵지 않게 걸어 올라왔는데, 어제 코스보다는 더 힘들 것이다. 시작부터 오르막이었다. 얼마 안 가 산티아고 순례길의 상징물 중 하나인 ‘철의 십자가’에 도착했다. 11세기에 세워졌다는 철의 십자가는 천주교인뿐만 아니라 모두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프랑스에서 온 노부부는 눈물을 글썽이기까지 했다. 모두 한동안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철의 십자가 기둥에는 돌무더기가 있다. 이곳을 지나는 순례자들이 놓고 간 것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의 전통 중 하나는 순례자가 고향에서 가져온 돌을 기둥 밑에 두고 여행의 안전을 기원하며 각자 소원을 비는 것이다. 전 세계에서 순례자가 오니 여러 나라의 돌이 섞여 있다. 나도 준비해간 작은 돌을 조용히 올려놓았다. 한글이 쓰인 돌도 많이 보였다. 내려놓은 돌의 무게만큼 내 배낭도 가벼워지고, 내 마음도 가벼워질 것이다. 철의 십자가를 지나 길목에 있던 푸드트럭에서 허기를 달랬다. 산 정상을 넘어 내려가는 길은 돌이 많고 경사가 있는 길이다. 이미 오래 걸은 순례자들에게는 쉽지 않은 길
산티아고, 나를 비우는 길
최광락
호수 1270
2022.06.16 16:21
-
어느새 아침 일찍 일어나 출발하는 것이 당연해졌다. 알베르게의 아침은 출발 준비로 모두 바쁘다. 준비를 마친 순례자는 차례로 출발해 앞사람의 뒤를 따라간다. 아스토르가는 도시가 예쁘고 성당도 훌륭하다. 성당 앞에 있는 주교관은 스페인의 천재 건축가 가우디가 설계한 것으로 유명하다. 아름다운 도시를 뒤로 하고 나오자 작은 지방도로를 따라 순례길이 이어져 있었다. 차는 거의 다니지 않는 길이다. 그런데 길을 걸어갈수록 조금씩 고도가 높아졌다. 어느새 옆으로 보이는 언덕이나 산이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됐다. 어제 아스토르가로 들어올 때도 고도가 높다고 생각했는데 그보다 훨씬 높아진 것이다. 한참을 걸어 배도 고프고 목이 마를 즈음 언덕 위의 마을 하나 눈에 들어왔다. 가장 먼저 식당으로 향했다. 뜻밖에도 태극기가 걸려 있는 식당이 보여 반가운 마음에 들어갔다. 그곳은 스페인 할머니, 할아버지 두 분이 운영하고 있었다. 나는 토마토를 거칠게 갈아 빵에 올리고 올리브유와 소금을 뿌린 음식을 먹었다. 달고 짭짜름해 맛있었다. 요즘 흔히들 말하는 ‘단짠’ 조합이다. 아침을 해결하고 다시 길 위로 올랐다. 서서히 더워지는 열기 속에 한참을 걸어 다음 마을인 라바날 델 까미노
산티아고, 나를 비우는 길
최광락
호수 1270
2022.06.15 21:03
-
오늘은 어제보다 30분 이른 오전 5시 30분에 출발했다. 시작은 역시나 도로 옆길을 따라 걸었다. 월요일 아침이라 그런지 어제와 달리 도로에 차가 많아 소음이 심했다. 자동차 소음을 들으며 어둠 속을 걸었다. 해가 뜰 무렵 목적지 길목에 있는 마을인 호스피탈 데 오르비고(Hospital de Orbigo)에 도착했다. 이 마을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오래돼 보이지만 아름다운 긴 다리가 놓여 있었다. 역사적인 기념물이다. 다리를 건너자 식당이 있어 아침을 먹기 위해 잠깐 들렀다.식사를 마치고 나와 마을 안쪽 길을 따라 걷는데 모퉁이에서 돌아 나오는 한 미국인 순례자를 마주쳤다. 그는 지금 내가 걷고 있는 길은 한참 돌아가는 길이라며 도로를 따라 걷는 길이 목적지인 아스토르가(Astorga)까지 가는 지름길이라고 일러줬다. 순간 목적지까지 빨리 가고 싶은 욕심에 그의 뒤를 따랐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걱정에 지나가는 동네 주민에게 확인차 이 길이 올바른 길이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동네 주민은 그런 길은 없고 순례길은 마을 안쪽으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알려줬다. 동네주민의 말에 나는 발길을 돌려 아까 건너온 다리를 다시 건넜다. 같은 다리를 세 번 건넌 셈이다. 나는
산티아고, 나를 비우는 길
최광락
호수 1270
2022.06.14 20:40
-
어제는 빗방울이 간간이 떨어지는 날씨에도 레온 거리가 가득 찼다. 주말을 즐기려는 시민, 관광객, 순례자들이 한데 어우러졌다. 젊은이 중에는 가장무도회에 온 듯 특이한 옷을 입고 있는 이들도 보였다. 잠자리에서도 밖에서 나는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왔다. 오늘도 오전 6시쯤 숙소를 나섰다. 새벽 거리에서 밤새워 토요일 밤을 즐기던 젊은이들이 각자의 집 혹은 숙소로 돌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술에 취한 이가 대부분이었다. 더위가 가라앉은 주말 밤을 여한 없이 즐기고 돌아간다.어제 잠시 비가 왔지만, 오늘은 하늘이 맑았다. 레온을 빠져나오는데 한 시간 정도 걸렸다. 레온을 완전히 벗어나고도 레온 주변의 작은 마을들과 연결된 도로 옆을 한참 걸었다. 한 마을을 통과하다가 아침을 먹기 위해 식당에 들렀다. 그곳에서 하몽, 치즈 등을 넣은 바게트인 보카디요와 커피 한 잔을 주문했다. 그러자 주인이 손을 내저었다. 식당에서 주문한 빵이 아직 들어오지 않아 만들 수 없다는 것이다. 그때 할머니 한 분이 다가오더니 조금 오래돼 굳은 바게트 빵을 구워줘도 괜찮겠냐고 물어봤다. 나는 그 빵도 좋다고 답했다. 할머니는 빵 속에는 무엇을 넣을지 다시 물었다. 하몽이 좋겠다고
산티아고, 나를 비우는 길
최광락
호수 1270
2022.06.13 19:58
-
어제 오후 1시쯤 만시야에 도착했을 때의 기온은 37도였다. 오늘 오전 6시 숙소를 나서며 확인해보니 15도였다. 일교차가 20도 이상이다. 아침에 출발할 때는 선선하고 맞바람이 불면 썰렁할 정도인데, 해가 뜨자 금방 기온이 올라 등에 땀이 촉촉이 올라온다.오늘은 레온(Leon)으로 이어져 있는 도로 옆을 따라 걸었다. 18km가량을 걸어 레온주의 주도인 레온에 도착했다. 레온은 대도시라 주변에 작은 마을이 많다. 레온에 들어와서도 숙소까지는 한참을 걸어야 했다. 숙소로 향하는 길에 하늘을 보니 먹구름이 잔뜩 껴 있었다. 다행히 비는 숙소에 도착한 직후에 쏟아졌다. 허기를 달래기 위해 숙소에다 짐을 풀고 밖으로 나가 타파스에 포도주 한잔을 곁들여 먹었다. 타파스는 스페인에서 식사 전에 술과 곁들여 간단히 먹는 소량의 음식을 말한다. 타파스는 포도주나 맥주잔에 벌레가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잔 위에 음식이 담긴 접시를 얹어놓은 것에서 시작됐다고 한다.식사를 마치고 레온 중심부에 있는 대성당을 구경하려고 갔으나 오후 3시부터 입장이 가능하다는 안내를 받았다. 잠시 뒤에 다시 방문해봐야겠다.며칠 전부터 순례길의 이정표 역할을 하는 표지석에 목적지 산티아고 데 콤
산티아고, 나를 비우는 길
최광락
호수 1269
2022.06.12 17:47
-
오늘도 이른 아침 베르시아노스 델 레알 까미노의 알베르게를 나섰다. 초반에는 지방도로 옆을 따라 나 있는 길을 걸었다. 처음 나타난 마을의 식당에 들렀더니 한글 메뉴판이 보였다. 반가운 마음에 메뉴판을 훑어보니 한국의 라면과 즉석밥도 있었다. 한국인이 많이 방문하는 산티아고 순례길에는 식당이나 성당 등 다양한 장소에서 서예 글씨로 쓴 한문이나 한글을 볼 수 있다. 모두 한국인을 위한 스페인 사람들의 친절이다. 나는 사과파이에 커피를 곁들여 간단히 아침을 해결했다.다시 길을 나서 마을도 없는 길을 12km 정도 걸었다. 다행히 날씨가 매우 더워지기 전에 다음 마을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거의 매일 마주치는 호주,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브라질 등 여러 나라 친구들을 만나 인사를 나눴다. 독일 아주머니는 오전 5시 반 출발해 걸어왔다고 말했다. 그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휴식을 취하고 다시 길 위로 올랐다. 뜨거운 태양 아래 한 시간 정도를 더 걸어 오후 1시쯤 오늘의 목적지 만시야 데 라스 물라스(Mansilla de las Mulas)에 도착했다. 여기까지 27km의 여정이었다.숙소에 도착해 온도를 확인해보니 37도였다. 지인으로부터 서울도 상당히 더
산티아고, 나를 비우는 길
최광락
호수 1269
2022.06.11 18:26
-
오늘도 여느 때처럼 동이 트기 전 출발했다. 테라디요스 데 로스 템플라리오스의 숙소를 나서 초반에는 메세타 평원을 따라 나 있는 고속도로 옆으로 걸었다. 플라타너스 나무가 양옆으로 줄지어 있는 길은 한국의 어느 시골길 느낌이 났다. 들판이 끝나가는 곳에서 중소도시 사하군(Sahagun)이 보이기 시작했다. 맨눈으로 도시가 보이길래 금방 도착할 줄 알았다. 막상 걸어가 보니 도시로 들어가기까지 한 시간가량 더 걸렸다.당초 오늘 칼자디아 데 로스 에르마니요스(Calzadilla de los Hermanillos)로 갈 생각이었다. 칼자디아의 숙소 사정이 좋지 않다는 소식에 베르시아노스 델 레알 까미노(Bercianos del Real Camino)에서 하루 묵기로 했다. 오늘 머무는 곳 역시 순례자 협회가 지정한 마을 중 하나다. 여기까지 23km의 여정이다. 사하군을 통과해 한참을 걸어 오후 1시쯤 목적지에 도착했다. 순례길 위의 작은 마을들은 인적이 드물다. 크고 작은 도시에서는 때깔 좋은 젊은이들이 많이 보였다. 하지만 이 마을 같은 농촌에는 빈집도 많고 도시로 떠나지 못하는 노인들이 살고 있는 듯했다. 마을 주변에는 밀, 보리, 귀리, 옥수수, 감자 등
산티아고, 나를 비우는 길
최광락
호수 1269
2022.06.10 17:27
-
엊저녁 까리온 데 로스 꼰데스에서 순례자를 위한 미사에 참석했다. 신부님이 한 사람 한 사람 머리에 손을 얹고 강복을 주시고는 순례자용 여권인 크레덴셜에 도장을 찍어 줬다. 이렇게 진행한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던 나는 숙소에 크레덴셜을 두고 왔다. 내 차례가 왔다. 나는 신부님께 장난스럽게 웃음을 지어 보이며 팔목을 내밀자 그는 재치 있게 팔목 위에 도장을 꾹 찍어 줬다. 신부님이 보증한 몸이니 마지막까지 순례를 잘 마칠 수 있겠다 싶어 팔목을 씻지 않고 있다.오늘의 코스는 중간에 마을도 없고 해가 나면 피할 곳도 없는 길이다. 다리나 무릎이 아파서 걷는 데 부담을 느끼는 순례자들은 까리온에서 버스를 타고 레온(Leon)으로 간다. 레온은 순례길 전체의 중간 지점이다. 버스 요금은 15유로다. 같은 알베르게에서 함께 머물렀던 몇몇 순례자들은 버스를 타고 이동했다.오늘은 오전 5시 40분, 동이 트기 전 가장 어두울 때 숙소를 나섰다. 한참을 걷고 있는데 때마침 푸드 트럭을 발견했다. 그곳에서 크루아상과 커피로 아침 식사를 해결했다. 식사가 끝나갈 무렵, 다리 수술로 인해 걸음이 느린 독일 아주머니가 트럭으로 다가왔다. 그는 빈자리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같이
산티아고, 나를 비우는 길
최광락
호수 1269
2022.06.09 13:55
-
벌써 산티아고 순례길 전체 여정 중 절반이 지났다. 아침에 날짜를 헤아려보고 ‘이 길을 걸어온 만큼 남은 거리도 그만큼 줄었겠지’ 생각하며 힘차게 숙소를 나섰다. 오늘은 프로미스타에서 까리온 데 로스 꼰데스(Carrion de los Condes)까지 19.7km를 걸었다. 잠깐 마을에 들르는 것 말고는 도로 옆을 계속 걸었다. 지루할 법한 길에서 갓길에 핀 들꽃들이 반겨줬다. 지평선 너머가 보일 정도로 넓은 평원도 시원하니 보기 좋았다. 오늘의 목적지 까리온에 도착하니 순례길 중간에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까지 모두 보여 반가웠다. 휴가를 끝내고 한국으로 돌아갈 예정인 분들도 만났다. 내일은 메세타 고원 17.3km를 마을도 들르지 않고 그늘도 없는 길을 걸어야 한다. 내일을 위해 오늘 충분히 쉬어둬야 한다. 저녁 식사 전 내일 먹을 물이나 음식도 미리 준비해야 한다. 이제는 걷는 게 제법 익숙해진 것 같다. 발도 순례에 적응한 듯 괜찮아졌고 배낭도 가볍게 느껴진다. 하지만 막상 걷다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어릴 적 연세가 많이 드신 외할아버지께서 번쩍 지던 지게를 젊은 나는 비틀거리며 멨던 기억이 난다. 무엇이든 몸에 익어야 제대로 할 수 있구나 싶다. 어
산티아고, 나를 비우는 길
최광락
호수 1269
2022.06.08 12:39
-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은 지도 벌써 보름째다. 어제 묵은 알베르게에서 저녁으로 비빔밥을 먹었다. 오랜만에 먹는 제대로 된 한식이라 아주 맛있게 먹었다. 오늘 아침 5시부터 짐을 꾸리고 준비해 6시쯤 길을 나섰다. 카스트로헤리스에서 프로미스타(Fromista)까지 25.3km를 걷는다.분지를 빠져나오느라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부터 완만한 산 높이의 언덕을 올랐다. 평평한 정상 부근을 지나 내리막길을 한참 걸었다. 언덕에서 내려오니 평탄한 지형이어서 가벼운 발걸음으로 목적지를 향해 걸었다.그러다 보니 어느새 카스티야 운하를 따라 걷고 있었다. 갈대와 새소리, 드넓은 평야가 서로 잘 어울리는 풍경이었다. 운하에는 유람선도 다녔다. 한가한 모습이 마음을 편하게 했다. 도착한 프로미스타는 운하의 끝에 있었다.숙소에서 취침 준비를 마치고 침대에 앉아 아직 불편한 발가락의 상태를 확인했다. 왼쪽 새끼발가락에 물집이 다 낫지 않아 약을 발랐다. 건너편 침대에 자리 잡은 아저씨가 유심히 보더니 내게 손짓을 했다. 그는 잠깐 기다리라고 하고서는 아래로 내려가 구급함을 가져왔다. 내게 잠깐 누우라고 다시 손짓하더니 밴드를 오려 발가락을 정성껏 감아줬다. 나는 고맙다는 말
산티아고, 나를 비우는 길
최광락
호수 1269
2022.06.07 16: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