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둥산 정상 능선의 억새밭
동으로 고부산 파노라마 펼쳐지고 남으로 가을 단풍 어릿

민둥산 정상
민둥산 정상

단풍에 한 걸음 앞서 우리를 찾아온 억새꽃의 하얀 보풀이 바람과 빛을 만났다. 보는 이의 마음도 따라 흔들린다. 가을이다. 

억새꽃은 햇빛과 바람에 시시각각 다채로운 빛을 낸다. 햇살의 비스듬한 역광은 투명한 은빛의 출렁임을 낳는다. 억새의 싱싱하고 까칠한 푸른 잎들 위로 낱꽃망울의 선홍빛 부챗살은 가을바람에 씨앗을 날려 보낸 후 새하얀 꽃처럼 다시 핀다. 그래서 억새는 초록에서 보라색, 다시 은색과 흰색으로 바뀐다. 10월이면 새하얀 꽃으로 변해 마지막 꽃의 날개를 바람에 맡긴다. 
 

강원도 ‘리틀 백록담’에 억새 만발

전국 5대 억새 군락지 중 하나인 민둥산은 해발 1119m다. 정상의 66만여㎡에 달하는 능선을 억새가 하얗게 뒤덮고 있다. SNS에는 한라산의 백록담을 닮은 푸른 초지의 풍경을 담은 인증사진들이 가슴을 설레게 한다. 

화산 분화구처럼 보이는 민둥산의 돌리네(doline)
화산 분화구처럼 보이는 민둥산의 돌리네(doline)

정체는 돌리네(doline)다. 석회암 함몰로 생긴 타원형의 웅덩이다. 기반암이 석회암으로 이뤄진 지역에서는 석회암의 주성분인 탄산칼슘이 빗물에 녹으면서, 돌리네 중앙에는 빗물이 빠져나가는 싱크 홀(sink hole)이라는 배수구가 발달한다. 민둥산 정상에서 보는 돌리네의 중앙에는 빠져나가지 못한 물이 작은 호수를 만들어 신비함을 더한다. 

민둥산 아래 800m 기슭에는 발구덕(發九德)이란 마을이 있다. 마을 유래는 이렇다.

“지금으로부터 300여 년 전 평해 황씨가 이주해 움막을 짓고 개척해 지금에 이르고 있다. 크고 작은 분지로 된 구덩이가 여덟 개로 형성돼 있어 ‘팔 구데이’라고 불렸다. 이를 한자로 차용하는 과정에서 발구덕이 됐다.”

민둥산 정상의 돌리네는 가을이면 은빛 억새가 능선으로 물결치며 돌리네의 함몰된 구덩이로 흘러든다. 민둥산의 돌리네를 관찰하려면 무릉리 능전(能田)마을에서 발구덕을 거쳐 오른다. 능전마을은 임계로 가는 421번 지방도로 옆에 있는 마을. 산세나 지세를 보아 고을이 깊고 편편하니 능전이라고 했다. 

능전마을-발구덕-돌리네 3.3㎞로 1시간 20분이면 정상에 오른다. 민둥산 돌리네를 한 바퀴 둘러보고 이어진 민둥산 정상에 오른다. 발구덕마을의 배추밭이 자리하고 있는 곳에는 윗구뎅이, 아랫구뎅이, 능정구뎅이, 굴등구뎅이, 소(쇠)구뎅이, 큰솔밭구뎅이, 삿갓구뎅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현지인이 부르는 구덩이인 돌리네 지형을 관찰하고 찾아보는 재미도 있다. 

억새축제가 열리는 9~11월을 제외하고 차량통행이 가능하다. 여름이면 발구덕쉼터까지 차량으로 이동해 쉽게 산을 올랐다는 사람들도 볼 수 있다. 발구덕쉼터에서 30분이면 민둥산 정상 바로 밑 돌리네까지 오를 수 있다. 

민둥산의 억새밭은 50여 년 전 불을 놓아 만든 화전밭이었다. 화전정리법이 생기고 화전민들이 떠난 자리에 억새가 자랐다. 이제는 가을이면 들뜬 마음으로 찾는 억새군락지로 변모했다. 과거의 불과 그을음이 만든 터. 곡괭이로 일궈 배추와 무를 심던 수십만 평 능선은 여름의 푸른 초지와 가을의 은빛 물결로 장관을 이룬다. 
 

“익숙한 노래 한 소절 맹감나무 붉은 눈물도 없이 
억새꽃, 그 하염없는 행렬(行列)을 보러 간다
아주 멀리 가지는 않고 내 슬픔이 따라올 수 있는
꼭 그만큼의 거리에 마을을 이루고 사는
억새꽃도 알고 보면 더 멀리 떠나고 싶은 것이다
제 속에서 뽑아 올린 그 서러운 흰 뭉치만 아니라면
나도 이 저녁 여기까진 오지 않았으리” 

- 유강희 ‘억새꽃’

 

내 슬픔이 따라올 수 있는 꼭 그만큼의 거리는 어디까지일까. 유강희의 시 ‘억새꽃’은 가을이면 무엇인가 슬픈 그리움 같은 울림으로 새겨진다. 해는 오후를 넘어 하얗게 억새꽃 사이를 비추고 은빛으로 부서진다. 민둥산 능선을 걷다가 잠깐 시선을 돌리면 동으로 고부산의 파노라마가 산 아래로 펼쳐지고 그 너머 백두대간의 지맥이 수묵화를 이룬다. 남쪽으로는 두위봉의 능선들이 길 하나 사이로 바로 눈 앞에 펼쳐지며 가을 단풍이 어릿하다. 

11월 5일까지 열리는 민둥산 축제 기간 등산객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경로는 1코스다. 남면 무릉리 증산초등학교 옆의 천불사에서 10여 분 올라 갈림길에서 좌측의 둘레길 구간을 따라 민둥산 억새 능선으로 이어지는 코스다. 2시간 정도 걸린다. 이어 능선의 직선코스를 따라 내려오면 빨리 원점회귀 한다. 서울에서 당일치기 철도 여행으로 청량리역과 정선 민둥산역(3시간 20분 소요)을 하루 7회 오가는 무궁화 열차를 이용할 수 있다. 

 

전국 5대 억새 군락지 감상해볼까

강원 정선의 민둥산, 경남 창녕 화왕산, 경기도 포천 명성산, 경남 영남알프스 사자평고원, 전남 장흥 천관산이 전국 5대 억새 군락지로 꼽힌다. 

▷화왕산(경남 창녕)= 오래전 화산이 폭발해 형성된 산이다. 람사르협약 보호 늪지인 우포늪과 함께 창녕을 대표하는 곳이다. 봄이면 산 전체가 불타오르는 듯 만발한 진달래, 가을에는 분화구 주변의 평원에 하얗게 나풀대는 억새가 장관을 이룬다. 화왕산은 마치 분화구에서 억새꽃들이 햇살을 받아 팝콘이 튀는 듯하다. 분화구 주변을 에워싼 억새들은 능선의 기암들과 화왕산성의 배경이 어우러져 가을빛에 더욱 고즈넉하다.

명성산
명성산

▷명성산(경기 포천)= 산정호수 주차장에서 계곡을 따라 비선폭포와 등룡폭포를 지나 완만히 올라가는 코스가 일반적이다. 예전의 화전민 터에 새하얗게 피어나는 억새꽃은 과거의 힘들었던 추억마저 잊게 만든다. 계곡의 단풍과 어우러진 행복한 억새 산행을 할 수 있다.

영남알프스 신불산의 억새꽃 (10월)
영남알프스 신불산의 억새꽃 (10월)

▷영남알프스= 밀양시, 양산시 그리고 울산시 울주군을 주변에 두고 있다. 석남터널을 중심으로 가지산(1240m), 운문산, 천황산, 능동산과 신불산, 영축산 등 해발 1000m가 넘는 산들이 맥을 이루고 있다. 유럽의 알프스를 닮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가을이면 간월산과 신불산 사이 간월재의 10만 평 규모의 억새 군락으로 새하얀 평원이 만들어진다. 억새는 신불산의 능선으로 계속 이어지며 가을빛에 눈이 부시다. 신불산에서 영축산으로 가는 완만한 능선은 기암들과 억새의 오솔길이 손에 잡힐 듯 고봉들이 하늘에 맞닿아 이국적인 풍경들을 만드니 가히 알프스다.

▷천관산(전남 장흥)= 지리산, 내장산, 월출산, 능가산과 함께 호남의 5대 명산으로 꼽힌다. 해발 723m로 높지는 않다. 정상 부근의 바위들이 비죽비죽 솟아 있는 모습이 마치 주옥으로 장식한 천자의 면류관 같다고 해서 천관산이라 이름 붙였다. 정상에 오르면 기암괴석과 어우러진 40만 평의 억새밭이 장관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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