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충남 서산・예산 역사 답사 여행

옛날 내포지역이라고 불렸던 충남 서산, 예산, 홍성은 백제시대부터 중국 대륙과의 교류가 활발하게 이뤄졌던 길목이다. 그래서 백제 불교문화의 정수와 역사를 진정으로 느껴볼 수 있는 곳이다. 매년 봄가을 두 번씩 진행해 오던 서강대학원 OLC 동문 가족 해설 답사 여행을 19차로 다녀왔다. 동문 가족과 함께 하는 역사 답사 여행을 즐기며 동문 간의 친목도 다지는 의미 있는 여행이다. 서산 삼존 마애불, 해미읍성, 개심사, 천하제일 명당 남연군묘, 추사 김정희 고택 등 5곳을 답사했다. 

충남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의 마애여래삼존상은 6세기 인도와 중국 불교가 태안반도를 거쳐 백제로 전해져 한반도에 정착하는 국제 핵심 교류를 알려주는 소중한 문화 유적이다. 관광버스에서 내려 용현집이란 식당 맞은편에 있는 계곡의 데크 계단을 건너 50m여 걸었다. 다시 암벽 너덜계곡의 급경사 데크 계단을 30m쯤 올랐다. 기와집 관리소 왼쪽에 있는 조그만 불이문 들어서서 짧은 돌계단을 올라갔다. 

암벽에 조각된 서산 마애여래삼존상
암벽에 조각된 서산 마애여래삼존상

 

마애여래삼존상의 과학과 예술

갓을 쓴 듯 넓은 돌이 얹힌 천연 바위 절벽에 조각된 2.8m 높이의 삼존불상이 시선을 확 끈다. 삼존마애불 왼쪽에는 웃음 가득한 미소를 지닌 제화갈라보살 입상이, 오른쪽에는 천진난만한 소년의 미소를 품은 듯한 미륵반가사유상이 있었다. 특히 중앙에 있는 석가여래입상의 미소는 세계 최고의 미소로 불리는 모나리자의 미소보다 백배 천 배나 아름답다. 중생을 보듬는 미소로 백제 불상 특유의 자비로움과 여유로움을 더한층 느끼게 해줬다. 

불상의 미소는 빛이 비치는 방향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고 했다. 아침에는 밝고 평화로운 미소다. 저녁에는 은은하고 자비로운 미소를 보여준다. 또 마애불이 80° 각도로 기울어져 있어 비바람이 정면으로 들이치지 않게 하는 과학적 치밀함도 갖추고 있다고 한다. 1000년을 넘게 지탱해 온 엄청난 작품이다.

개심사 전경
개심사 전경

 

개심사 계단 오르니 저절로 힐링

서산의 최고 인기 여행지 개심사는 충남 4대 사찰로 의자왕 14년에 백제의 승려 혜감에 의해 창건됐다. 조선 성종 6년에 불타 없어졌다가 성종 15년에 새로 지어져 중창을 거듭하며 지금에 이르고 있다. 봄에는 아름다운 겹벚꽃이 경내를 탐스럽게 물들이는 겹벚꽃의 성지로 잘 알려져 있다. 여름에는 붉디붉은 배롱나무꽃이 아름다움을 선사해 준다. 

개심사 오층석탑과 대웅전 전경
개심사 오층석탑과 대웅전 전경

입구 상점 앞을 지나서 일주문 안으로 들어섰다. 숲길 돌계단을 천천히 올랐다. 사찰로 오르는 계단이라 생각하니 힐링이 저절로 되는 듯했다. 사찰 앞 직사각형의 연못 가운데 통나무 외다리를 건넜다. 나뭇가지가 무성한 배롱나무꽃은 거의 다 떨어져 아쉬움이 아주 컸다. 다시 돌계단을 올라 상왕산 개심사라는 현판이 달린 안양루와 해탈문을 지나 대웅전 앞마당으로 들어섰다. 대웅전과 신검당, 요사채가 모여있는 한가운데 5층 석탑이 서 있었다. 작고 아담하면서 소박함이 느껴지는 천년 고찰을 돌아봤다. 굽잇길을 천천히 돌아 주차장으로 내려오는 동안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을 받았다.

남연군묘
남연군묘

 

명당 찾아 500리 이동한 남연군 묘

천하의 길지는 어떤 곳일까? 흥선대원군은 2대에 걸쳐 천자가 나올 자리라는 지관의 말을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경기도 연천에 있던 아버지 남연군의 묘를 500여 리를 상여로 이동해 지금의 묘터로 이장했다고 한다. 천하의 길지라니 무척 궁금하다. 

언덕길을 조금 올라 너른 코스모스 군락지를 지나 높게 조성된 묘에 올랐다. 묘 뒤쪽으로 600m가 넘는 석문봉과 옥망봉으로 이어지는 산 능선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정중앙에 딱 자리 잡은 묘소는 그렇게 아늑하고 포근해 보일 수가 없었다. 

그 자리에 돌아서서 앞을 바라본다. 오른쪽에 가야산과 왼쪽에 서원산 능선이 좌청룡과 우백호 날개가 돼 묘를 보호하는 듯 품어주고 있었다. 풍수에 문외한이 봐도 명당 중의 명당임을 바로 느낄 수 있다. 빼어난 길지다. 1868년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려다 실패한 일이 터졌다. 이 사건이 대원군이 서양을 배척하는 쇄국정책을 실시하고 천주교 탄압을 강화하는 계기가 됐다.

남연군 묘 왼쪽 건너편 서원산 자락에는 보덕사가 있다. 묘를 쓴 후 7년 후에 차남 명복이 태어났고, 그가 고종으로 철종의 뒤를 이어 12세에 왕위에 올랐다. 이에 대한 보은의 뜻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많은 사람이 풍수지리를 믿는 이유가 있구나 싶다.

추사 김정희 묘소
추사 김정희 묘소

 

‘서화계의 신선’ 추사 고택과 묘소

한중일 3국의 대학자와 명필가로 추앙받는 추사 김정희 선생 고택과 묘소는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의 나지막한 용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었다. 맨 오른쪽에 영의정을 지낸 고조할아버지 묘소 앞에는 희귀한 백송이 멋진 자태를 뽐내고 있다. 왼쪽의 화순옹주 홍문으로 갔다. 추사의 증조할머니인 화순옹주는 영조의 둘째 딸이다. 경주 김씨 가문의 김한신과 결혼했으나 남편이 죽자 곡기를 끊고 14일 만에 남편의 뒤를 따랐다. 뒤에 정조가 화순옹주의 정절을 기리며 열녀문인 홍문을 내렸다. 조선 왕족의 유일한 열녀다.

추사 고조할아버지 묘소 앞 백송
추사 고조할아버지 묘소 앞 백송

 

화혜옹주 열려문 '홍문'
화혜옹주 열려문 '홍문'

추사 김정희는 중국의 왕희지로부터 시작해 소동파 등의 계보를 잇는 명필가로 인정받는 우리나라의 보물이다. 팔만대장경과 사서오경 등에 통달한 철학가이자 서화가로 호가 340개가 넘는다고 했다. 고택 안채에는 추사가 쓴 수십여 개의 현판이 기둥마다 붙어 있다. 글귀 하나하나마다 글의 뜻에 맞게 쓴 눈이 부신 서체로 다 다르게 쓰여 있었다. ‘서화계의 신선’이라는 칭호가 어울린다. 말로만 들었던 추사 김정희의 진면목을 확인하는 귀한 시간이 됐다.

서산시 해미읍 읍내리에 있는 해미읍성은 1491년(성종 22년)에 축조된 조선시대의 석축 읍성이다. 고창읍성과 순천의 낙안읍성과 함께 산성이 아닌 민가 마을에 축조된 3대 읍성 중의 하나다. 서해안 방어를 담당했던 성으로 폐성된 지 오래다. 성곽이 허물어지고, 성안의 건물이 철거되며 그 자리에 해미초등학교와 우체국, 민가 등이 들어서 있었다. 1973년부터 복원 사업이 많이 진행됐다. 지금은 성곽이 깔끔하게 원래의 제 모습을 찾아 읍성으로서의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서산 해미읍성 성벽
서산 해미읍성 성벽

 

해미읍성, 전통문화 복원 재탄생

진남문 앞에서 단체 인증샷을 찍고 성문 안으로 들어섰다. 동헌으로 통하는 길 오른편으로 조선시대의 각종 화포들과 신기전기 화차 등이 재현해 전시돼 있었다. 그 사이에 실물크기 포졸들의 조형물도 익살스러운 표정으로 서 있었다. 

안쪽으로 더 들어가니 원형 기와집 마당에 곤장 형틀과 함께 포졸과 죄수 등 조형물이 함께 전시돼 있어 재미있게 돌아봤다. 사또가 업무를 보는 동헌은 보수작업이 이뤄지고 있어서 들어가 보지 못했다. 사물놀이 연습이 이뤄지는 잔디밭을 옆을 지나니 해미읍성이 나왔다. 읍성은 전통문화를 복원하고 전시하는 공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이번 답사여행은 추적대는 비를 맞으며 진행됐다. 해설 덕에 어느 때보다도 알찼다. 많은 것을 보고 느끼며 배움이 가득한 여행이 된 것 같아 뿌듯한 가슴을 안고 귀경 버스를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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