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세상

 

오정순  수필가

 

횡성 더덕축제에 갔다가 행사장 한 코너에서 봉숭아꽃물을 들여왔다. 아주까리 이파리와 실이 없어도 비닐과 테이프로 손쉽게 물을 들여줬다. 집에 돌아와 풀어보니 꽃물이 흘러서 두 손가락 끝마디가 시뻘겋다. 다소 지저분해 보였다. 손톱에 꽃물을 들이며 동심을 소환했으므로 며칠 참는 것은 용서됐다.  
다음날 내 손가락을 본 딸은 핏물이 낭자한 것 같다고 상을 찌푸렸고 나는 인정했다. 아무리 그렇다고 봉숭아 꽃물들인 엄마에게 그게 무슨 낭만에 초치는 소리냐고 하고 싶었으나 실은 나도 김치국물이 묻은 것 같았기에 웃고 말았다. 자연 소재거나 화학소재거나 꾸며서 보기에 좋으라고 하는 것인데 도시에서 자란 젊은이는 매니큐어 문화와 충돌을 빚는다. 추억이란 이름으로 그 무엇을 할 때는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몇 해 전에 어머니가 한산 모시를 두 딸에게 줘서 윗옷을 맞춰 입었다. 어서 해 입고 어머니 앞에서 품위 있는 모습을 보여달라고 성화를 해 삯을 20만원이나 들여 옷을 지어 입었다. 그러나 바느질 삯이 비싼 데 비해 실용성이 없다. 러닝셔츠를 입고 덧입으니 땀이 나고 에어컨이 틀어져 센바람이 있는 곳에서는 성근 질감 때문에 서늘해서 이도저도 현대 사회에 맞지 않은 옷이다. 당시 삯 값으로 다른 옷을 사 입었다면 몇 해는 충분히 잘 입었을 것이란 판단이다.   
우리에게 사라진 전통을 불러들이기 위해 시간과 돈과 에너지를 쓴다는 것이  때때로 무모한 소비로 보일 때가 있다. 그 문화가 그립고 가치 있게 보여서 손을 댔다가 수렁에 빠지는 수도 있다. 바로 자수공예가 그렇다. 
아들 둘을 잘 키운 어느 어머니가 결혼 시킬 때 사용할 거라고 폐백 옷의 흉배와 3층 함에까지 자수를 놔 완성품을 해두고 신부감을 기다렸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그 물건이 전체적으로 어울려야지 그것만 덜렁 품위가 있고 도드라질 때는 되레 이질감이 드는 법이다. 그 물건의 가치는 알지만 그것보다 가능하면 집 마련하는 데 보탤 현금이 더 필요했다. 그래도 정성들여 만들어진 작품 수준의 자수 공예품은 두 아들네로 건너 갔다. 어머니의 손끝으로 수놓인 품위는 서서히 천덕꾸러기가 돼 홀로 멋진 폼새로 자리만 차지하다가 피신시켜야 했다.
모시 옷이 걸어두는 옷이 되듯 3층짜리 함도 모셔두기가 곤란한 물건이 됐다. 정성과 품위는 누가 봐도 인정하지만 아파트의 어디에도 어울리지 않았다. 전통문화의 부산물은 곳곳에서 인테리어 파괴물로 취급을 당하면서 환영받지 못한다. 
특히나 일을 하는 여성들에게 조심스럽게 다뤄야 할 물건은 부담스럽다. 타인의 손을 탈까봐 보석조차도 거부하는 실정이다. 그들은 직장 일에 충실하고 집 인테리어나 기타에 집중할 수 없는 입장이다. 특히나 육아 중인 직장여성은 널린 빨래를 걷어 갤 시간도 모자란다는 이야기인데 정성과 품위는 걸리적거리는 존재감으로 빛을 잃는다. 어느 집 며느리가 화랑에 와서 푸념을 한다. 자신이 좋아하지도 않는 그림을 시아버지가 취미 삼아 그렸다고 자꾸 아들네 집에 가져다 줘서 난처하다는 이야기다. 값나가는 그림이라면 나중에 팔 수라도 있지만 벽에서 떼어낼 수도 없다는 이야기다. 듣고 보니 그렇기도 하다. 
정성과 품위가 깃든 물건인데 마음에 들지 않을 때는 곤혹스러워진다. 없어서 못쓴다는 말 앞에서는 낭만에 초치는 소리지만 모두가 존중해줘야 할 기호 앞에서는 한번쯤 현실성에 맞는지를 타진할 필요가 있다. 결국 그 수공예품은 수를 놓은 이에게 잠시 맡아달라는 의미로 피신했다. 
주는 일에는 늘 조심이 따른다. 진정성을 담은 정성이 자칫하면 멋진 시어머니 코스프레로 인식되기 십상이다. 준 사람과 받는 사람 사이에 감사가 들앉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갈수록 미니멀리즘으로 바뀌는 시대적 특성을 알면 행사를 치르는 집에서는 문화적 충돌로 어려움이 따를 것이다. 이 또한 전통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낭만에 초치는 소리가 아니려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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