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설

전혀 위험해 보이지 않는 곳. 사고가 난다해도 충분히 빠져나갈 수 있는 곳. 친숙하고 잘 아는 공간이어서 편안한 곳. 사고는 그런 곳에서 일어난다. 
적어도 내 안전만큼은 스스로 충분히 보장한다고 자신할 때, 사고는 나를 덮친다.
아파트에서도 종종 그런 일들이 발생한다. 관리직원이 자주 들어가는 곳. 용역업체 직원이라면 거의 매일 순회하며 들어가는 곳이 정화조다. 용역업체 직원은 아침 출근부터 저녁 퇴근까지 하루 종일 여러 건물을 옮겨 다니며 정화조에만 들어간다. 각 가정에서 배출한 분뇨들이 잘 부패되고 있는지, 산화까지 마친 오수가 잘 배출되고 있는지 점검하고, 이들을 연결하는 파이프가 막히거나 역류하지 않는지 등을 면밀히 살펴본다. 만에 하나 파이프가 막혀 오수가 배출되는 않으면 지하주차장 등으로 역류해 자동차가 똥물을 뒤집어쓸 수도 있기에 자칫 소홀히 하면 큰일을 치르게 된다.
그렇게 매일 드나드는 정화조에서 사망사고가 일어난다. 동절기를 지나 하절기에 접어들면 급격한 기온 상승과 강우가 잦아지면서 환기가 제대로 되지 않아 황화수소 중독, 산소결핍 등의 위험이 높아지는데, 이를 간과하고 들어갔다가 질식으로 쓰러지는 것이다. 게다가 아무런 장비도 착용하지 않은 채 이를 구하러 들어간 다른 직원마저 함께 질식해 숨지기까지 한다. 살인적 스케줄에 쫓겨 가며 일하다 생기는 안전불감증이 죽음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보다 훨씬 더 위험한 안전불감증이 있다. 불감증의 최대원흉은 바로 ‘오작동’이다. 아파트뿐만 아니라 일반 대형건물에서 오작동을 가장 많이 일으키는 장비는 화재경보장치다. 가장 안전하고 정밀해야 할 시스템이 오히려 가장 많은 에러를 유발한다.
지난 8월 21일. 지독한 폭염의 한복판, 모든 사람들이 비지땀 범벅으로 지쳐가며 작업에 매달리던 한낮에, 인천 남동공단에서 화재사고가 일어났다. 오후 3시 43분, 공장 4층에서 불이 났으니 상식적으로 대부분의 사람이 대피했어야 맞다. 외부인이라면 우왕좌왕하는 와중에 인명피해가 일어날 수도 있겠지만, 직원들은 매일 드나드는 건물의 출입문과 대피방향을 모두 꿰뚫고 있으니 사망사고는 아니었어야 했다. 그러나 이 사고로 9명이 숨지고 6명이 다쳤다. 스프링클러 등 소방시설이 갖춰진 건물에서 대형사고가 일어났다는 게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았으나, 사고 발생 두 달이 지나면서 원인이 밝혀지기 시작했다. 가장 큰 원인 제공자는 경비원이었다. 평소 오작동이 자주 일어났던 화재경보기를 아예 꺼버린 것이다. 그래서 불이 크게 번질 때까지 화재경보와 대피안내방송이 모두 차단됐다. 이를 왜 수리하지 않았는지도 밝혀야 한다.
사망자 중엔 아기를 낳은 지 한 달 만에 일터로 복귀한 엄마가 있었고, 결혼한 지 2년도 안된 새댁도 있었다. 죽은 사람도 억울하지만, 남은 가족의 찢어지는 비통함을 무엇으로 달랠까….
지난해 6월 부산의 한 아파트에서 불이 났다. 여기도 경보장치가 꺼져 있었고, 한 입주민이 다쳤다. 이 사고로 관리사무소장이 처벌을 받게 됐다. <관련기사 1면>
경보기는 소장이 부임하기 전부터 꺼진 상태였고, 소장이 수차례 입주자대표회의에 수리를 건의했지만 비용 부족으로 번번이 부결됐다. 이런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주민대표들과 피해 입주민 가족 등이 재판부에 간절한 탄원을 올려 다행히 징역형은 면하게 될 것 같다.
어떤 이유로든 경보기를 꺼놓은 건 잘못한 일이다. 그러나 가장 정확해야 할 생명담보장치가 허술하게 작동되는 건 분명 문제가 있다.
정부와 관련단체는 소방안전설비의 품질규정과 검사를 강화해야 한다.
경보기가 양치기소년이 돼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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