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세상

내게 샤넬은 샤넬라인이라는 단어와 핸드백, 그리고 화장품 정도다. 그러나 ‘명품에 숨겨진 예술이야기’란 짧은 강의를 듣고부터 나는 샤넬의 철학에 동의하며 명품을 떠나 동백꽃과 표범의 이미지가 부각됐다. 
샤넬이 아프리카 여행 중에 표범이란 동물에 매력을 느끼면서 표범의 이미지를 디자인에 응용했다. 아무리 배가 고파도 죽은 고기를 먹지 않는 표범의 기질이 샤넬의 마음에 들었다는 것은 그녀의 성격과 닮았다는 이야기다. 실용성을 앞세워 깔끔한 디자인을 선호했다. 질질 끌고 다니는 드레스 풍에서 여성을 해방시켜 치마 길이를 무릎 위로 잘라내 그 이름도 유명한 샤넬 라인을 탄생시킨 여자가 아니던가.  
샤넬을 상징하는 또 하나의 이미지가 동백꽃이다. 꽃이 지는 속성이 좋아 자신의 이미지로 차용했다. 동백꽃을 디자인해 자신의 구두 작품에 얹었으며 어느 작품이나  간결하고 실용성에 초점을 맞췄다. 여성의 삶이 옷으로 인격을 입는 데 도움이 되도록 주목했다. 불편한 요소를 제거하고도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여자였다.  
역사 속의 여인들이 남성 중심 사회에서 아이스크림이나 빵을 머리에 뒤집어쓴 듯한 모자 장식을 하고 긴 드레스를 입고 나타나는 것을 보고 그녀는 견디기가 어려웠다. 사교계에 진출해서도 유명 브랜드 모자를 사서 착용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디자인해 간결하고 멋스럽게 치장했으니 어느 여성으로부터도 부러움을 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러한  디자인 혁명은 여성을 아끼고 여성의 삶을 고려하는 철학 없이는 태어나지 못한다. 
그녀가 감동해서 디자인에 적용한 동백꽃을 나는 오래전에 보길도에서 만났다. 남은사로 가는 길목에서 동백나무 몇 그루가 고향나무처럼 남편과 우리 가족을 반겨줬다. 30년 전만 해도 해남에서 뱃길로 7시간 이상 가야 했다. 고산 윤선도에 대해 관심을 가진 사학과 출신이거나 국문과 출신들이 찾아가다 보니 길이며 가게가 여행자에게 편하지는 않았다. 
우리 가족은 남편의 고향인 노화도를 둘러보러 갔다가 잠시 머문 적이 있는 남은사를 들르기로 했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눈물도 마르기 전에 형들로부터 그 섬으로 보내진 서러움이 깃든 그곳에 간 것은 그 눈물을 바탕삼아 공부해 고시합격이란 자리를 얻었으니 가서 머물던 영광을 확인하고 눈물을 닦아내려던 참이었다.  
그날 아마도 남편은 나와는 다르게 정서적 교란이 일었을 것이다. 나는 되도록 말을 시키지 않았다. 뙤약볕 아래서 흙먼지 풀풀 날리는 길을 걸어도 목 축일 만한 곳이 보이지 않았다. 그때 걷다가 꽃목을 툭툭 떨군 동백꽃나무 몇 그루를 만났다. 멀리서 보면 핏물이 뚝뚝 들은 듯 바닥이 시뻘겠다. 충격적이었다. 그날의 분위기와 맞물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꽃잎은 유난히 붉고  꽃술은 샛노란 게 우리 가족에게 희망을 안겨주는 꽃으로 보였다. 
떨어진 동백꽃송이에 일찍 꽃목을 떨구고 간 시어머니가 오버랩됐다. 6·25 때 시아버지가 어디론가 끌려가자 시어머니에게 옷을 가져다 주겠느냐는 부탁에 집을 나섰다가 그 길로 어머니는 육지를 밟지 못했다. 훗날 누군가가 보길도 앞바다에서 시신으로 떠밀려 온 시어머니를 봤다고 하니 당시 40대 영락없이 목을 떨군 동백꽃송이다. 세상이 무서워서 아무도 염두에 둘 생각조차 못하고 어머니를 떠나보낸 아들이 그 섬에 발을 딛었다. 고생하고 자라서 금의환향한 막내아들이 가는 길목에 꽃목이라도 떨궈 환영해주고 싶은 어미의 마음으로 읽혔다. 무당이 건져냈다는 어머니의 머리카락으로 무덤을 만들었으니 위로인지 형식인지 알 바가 아니고, 나는 동백꽃송이로 시어머니와 마주 대한 듯했다. 
방학이라 그 섬으로 여행 가는 사람들이 늘겠지만 동백꽃송이를 보고 내 남편의 가슴을 느끼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만나보지 않은 두 사람, 샤넬과 시어머니에 이어 나도 죽는 날까지 싱싱하게 잎 내고 꽃피다가 동백꽃 지듯 명줄이 잘리기를 희망하며 오랜만에 샤넬 5 향수병 뚜껑을 연다. 개성껏 살다 간 한 여성을 부러워하는 몸짓으로 향수를 내 귀 뒤에 살짝 바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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