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는 종합예술이다 <171>

고려·조선시대에는 중앙집권 체제가 약해 지방사정에 밝고 경제적 능력이 있는 호족(豪族)을 급여(녹봉)도 주지 않고 지방행정의 실무를 담당토록 했습니다. 이들을 향리(鄕吏)로 임명해 이방(吏房)·호방(戶房)·예방(禮房)·병방(兵房)·형방(刑房)·공방(工房)의 육방관속으로 삼아 노역을 동원하고 세금을 징수하며 치안 실무 등 업무를 시키면서 신분과 업무는 세습하도록 했습니다. 

1. 직업공무원제의 성립과정
우리나라는 공무원이 정권의 시녀역할을 한다는 이유로 기도했 지탄을 받기도 했는데 오죽하면 선거법에 선거가 공고되면 산림훼손 단속과 밀주단속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규정까지 있었을까요. 미국은 선거에서 승리한 정치가 모든 관직을 사냥의 전리품처럼 나눠 주는 엽관제(spoils system)를 시행하다가 집권세력만 충성하는 무능, 부패를 타파하기 위해 공무원의 정년보장, 정치적 중립, 능력·자격·업무성적을 중시하는 실적주의(Merit System)를 확립하면서 직군(전문성), 직위(계급제), 생애급(적정보수)이 보장된 직업공무원제를 채택해 일반 근로자와 다른 법체계로 보호하고 있습니다. 공무원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집권세력의 시녀에서 벗어나 행정 전문가로서 전체 국민을 위해 봉사시키기 위한 것이지요. 이러한 직업공무원제 초기에는 행정을 관리기술로 보고 의회가 정한 법을 기계적으로 집행하는 ‘기술적 행정’을 하다가, 유한한 정치권력을 대신해 유능한 직업공무원이 국가를 경영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는 생각으로 다양한 위임입법(시행령, 시행규칙)을 허용하는 ‘기능적 행정’으로 변했으며, 1930년 세계 대공황을 거치면서 시의적절한 정책의 개발과 시행이 필요하다는 요구로 인해 공무원 조직이 국가를 선도적으로 이끌어 가야 한다는 ‘발전행정론’이 대세가 됐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새마을 운동, 경제개발5개년 계획 등을 공무원 조직에서 작성하고 이끌어 갔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공과는 있지만 국가가 가난하고 어려울 때 이 시기의 공무원들은 열악한 보수와 많은 업무량, 현장중심의 확인행정 등 상상하지 못할 정도의 격무에 시달리면서도 국가발전이라는 사명감을 앞세웠던 때도 있었습니다. 민간기업과 임금격차를 줄이기 위해 공무원에게 기말수당이라는 이름으로 상여금 제도가 처음 생긴 것은 1974년 말부터 인데 현재는 성과상여금도 주고 공무원 노조도 허용하고 있으니 격세지감입니다. 

2. 공무원이 그냥 노동자가 돼서는 안 되는 이유
국민은 국가라는 법인에 국가의 경영과 관리를 맡기고 일정한 비용(세금)을 납부한다는 국가계약설이 국가존립의 근거로 등장한 이후 국가는 사회질서 유지, 국가수호의 의무를 공무원을 통해 수행습니다. 영미법계는 공무원의 폭넓은 법해석과 판례 및 관습법에 따라 보안관제, 배심제(陪審制) 등을 인정하는 코먼 로(common law) 제도를, 대륙법계는 합리주의(合理主義)를 근본으로 예측가능성을 열기하는 성문법주의를 채택하고 있습니다. 결국 어떤 법체계를 따르냐는 것보다 공무원의 자질과 공정성이 더욱 중요한 문제입니다. 시·도지사는 관리규약 준칙만 만들고 시·군·구에서는 관리업무를 감독하도록 규정하고 있는데 일선 시·군·구의 공무원들은 관리부서를 기피부서가 아니라 혐오부서라고 인식하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얼마나 귀찮았으면 주택관리사 자격을 갖춘 사람을 계약직으로 채용해 민원 응대를 시킬까요? 계약직은 정년이 보장된 정규직 공무원도 아니고 업무에 대한 결정권도 적으며 공무원과 관리업무 관계자의 중간에서 그저 국토교통부의 유권해석을 기계적으로 답습하면서 호가호위(狐假虎威)할 수밖에 없으니 관리는 언제나 제대로 된 공무원의 관리서비스를 받을 수 있을까요? 차라리 관리소장에게 일정한 행정업무를 맡기든지, 현장은 답답하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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