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노원구 상계주공14단지

 

지난 1989년 입주를 시작해 30여 년간 자리를 지켜온 노원구 상계주공14단지아파트(서림주택관리). 총 26개동 2,265가구로 구성된 대규모 아파트 단지지만 콘크리트 가득한 여느 단지와는 달리 울창한 숲속에 아기자기한 건물들이 들어서 있는 공원 같은 인상을 준다. 나무가 많고 단지 구석구석 정자와 벤치가 마련돼 있어 입주민들이 녹음 속에서 휴식을 취하기에 그만이다.
입주민들을 위한 것은 이것뿐만이 아니다. 상계주공14단지는 다양한 공동체 활동을 통해 아파트를 진정 ‘입주민의 행복을 위한 공간’으로 조성해 가는 데 앞장서는 곳으로, 지난해 서울시 공동주택 공동체 활성화 사업에서 동상을 수상하는 등 공동체 활성화 활동이 두드러지는 아파트다.

▲ 2017 서울시 공동주택 공동체 활성화 사업 우수사례 발표회(첫째 줄 오른쪽 두 번째 최선규 관리소장)

공동체 공간, 입주민을 진정한 주인으로

상계주공14단지 최선규 관리사무소장은 지난해 12월 개최된 ‘2017 서울시 공동주택 공동체 활성화 사업 우수사례 발표회’에서 사례발표를 맡았다. 최 소장은 이날 상계주공14단지의 우수한 공동체 프로그램들의 취지와 진행과정상 어려움 등에 대해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 것에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고 말한다.
이 아파트의 간판 공동체 프로그램은 ‘문화사랑방’과 ‘작은도서관’으로, 최 소장이 2000년도에 처음 부임했을 때부터 소신을 갖고 만들고 지켜온 공동체 공간이다. 
문화사랑방이 본격적으로 운영된 것은 2002년경. 당시 ‘아파트 공동체’라는 개념이 정착되기 전이었고, 이에 대부분의 아파트는 문화프로그램 운영 시 관리사무소가 직접 관리비를 통해 운영하는 형태가 아니라 강사에게 단지 내 공간을 임대해주고 수익을 내는 불법적 형식으로 운영되는 곳이 많았다. 그렇다 보니 공공시설물임에도 불구하고 강의를 듣는 회원에게만 이용 혜택이 돌아가는 문제가 발생했다. 
이에 최 소장은 아파트 시설을 입주민 모두에게 돌려주자는 취지로 기존에 에어로빅 교실로만 이용되던 관리사무소 2층 공간을 철거하고 ‘문화사랑방’을 새롭게 조성, 컴퓨터 등 시설을 갖추고 입주민이라면 누구나 이용할 수 있도록 했다.
작은도서관 역시 문화사랑방이 조성되던 시기에 발맞춰 관리사무소 2층에 함께 마련됐다. 기존에 입주자대표회의 회의실로만 이용돼 한 달에 한번 회의시간 이외에는 유휴공간으로 남아 있어야 했던 곳을 도서관으로 개조함으로써 입주민들이 자유롭게 드나들며 소통할 수 있는 공간으로 변모시켰다.
이후에도 관리사무소와 입대의가 합심해 ‘아파트 시설은 입주민이 주인이 돼야 한다’는 소신을 가지고 입주민 중심 사업들을 적극적으로 추진해 온 결과, 공동주택 공동체 활성화 사업 이외에도 ‘2016 아파트 관리품질 등급제 우수단지’ 선정, 노원구 그린발전소 경진대회 ‘에너지절감 최우수단지’ 선정, 녹색아파트(경실련) 지정, 마을학교(노원구) 지정 등의 굵직한 성과들을 낼 수 있었다.
또한 이에 그치지 않고 향후 관내 중·고등학교와 연계, 중고 참고서도 도서관에 비치하는 방안을 추진하는 등 입주민 중심 공동체 공간 활성화를 위해 제도를 끊임없이 만들고 정착시켜 나갈 계획이다. 

공동체시설의 ‘취지’를 지키기 위한 노력

현재 문화사랑방에서 진행되는 강좌는 컴퓨터 교실, 맷돌체조 교실, 요가교실, 오금희(건강체조의 일종) 교실, 중국어 교실 등 총 13개로, 각 강좌마다 필요한 시설을 갖추고 있다. 특히 사랑방 내 컴퓨터 10대 등 기자재가 마련돼 있어 입주민들이 컴퓨터 실습을 할 수 있으며, 요가 등 체조강좌를 듣는 입주민들을 위해 별도의 공간에 개인 사물함을 마련해 편의성을 높였다. 
강좌는 대부분 입주민들의 재능기부로 진행된다. 외부에서 자원봉사자를 초빙하기도 하지만 강의를 수강한 입주민들이 이후 수업에서 강사로 나서기도 하는 선순환 덕분에 외부 강사의 비율이 높은 편은 아니다.
문화강좌 이외에도 입주민들은 문화사랑방을 자유롭게 대여할 수도 있다. 10명 이내의 소규모 인원이 뜨개질이나 회의 등을 하거나 또는 20명 이상의 인원이 모여 자녀의 생일파티를 진행하는 등 사유에 특별히 제한을 두지 않아 ‘사랑방’이라는 본래 취지를 살렸다.
작은도서관의 경우에도 이용의 자율성을 살리기 위해 많은 고민을 거듭했다. 그 결과 도서관 내 대부분의 책을 새 책이 아닌 헌책으로 채워 책 구입비용과 도서관 관리비용을 절감하고 이용편의를 확대키로 했다. 입주민이 관리사무소에 헌책 수거를 요청하면 직원이 가구에 방문해 책을 수거해 온 뒤 상태가 좋은 도서를 선별한다. 수거되는 책은 대부분 가정에만 있던 책이라 상태도 좋다. 또한 헌책이기 때문에 분실 등의 사고에 대한 부담도 적었다. 
노원구에서도 이 같은 도서관 운영 제도의 취지와 효과에 크게 공감해 도서구입비 200만원을 지원해 주기도 했다. 이를 통해 입주민들의 도서관 이용이 더욱 활성화된 것은 물론, ‘관리인 없는 도서관’을 만들고자 했던 처음의 취지와도 부합하는 공간을 만들 수 있었다.

▲ 처음 실버택배 운영을 시작한 입주민 이승희 씨

‘실버택배’의 시발점, 경로당의 긍정적 변신

상계주공14단지에서 운영되는 독특한 제도로 ‘실버택배’도 빼놓을 수 없다. 지난 2009년 노인회 소속 입주민 이승희(83) 씨가 고령의 입주민 5~6명과 함께 처음 시작한 것이 규모가 커져 현재는 20여 명의 어르신이 기사로 참여 중이며, 이를 본받아 타 지역 아파트 단지에서도 운영하기 시작했다. 현재 70~80대 어르신들이 담당구역을 정해 상계주공12~14단지(5,000여 가구)를 돌며 배송작업을 하고 있다.
실버택배의 시작은 경로당 내 어르신들이 봉투 붙이기 등 수입이 불안정한 소일거리에 매달리는 것이 비효율적이라는 생각에서부터였다. 이승희 씨는 “보다 건설적이고 지속가능한 수입원이 없을까 생각하다가 실버택배를 떠올리게 됐다”며 “개인별 배송건수에 따라 월 40만~100만원의 높은 수익이 발생하는 데다 몸을 자꾸 움직이니 건강에도 큰 도움이 됐다”고 설명했다.
입주민들 역시 단지 내 택배차량 진입이 없어져 안전·공해·소음 문제에서 벗어난 것은 물론 같은 아파트 입주민이 물건을 배송해 줘 더욱 안심하고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고 말한다.
실버택배 규모가 커짐에 따라 경로당 공간도 컨테이너로 확장해 작업공간을 따로 마련하고 택배분류 작업에 필요한 자바라컨베이어 등도 갖췄다. 이렇게 자리 잡기까지 경로당을 이용하는 입주민들과 크고 작은 분쟁이 발생하기도 했으며, 실버택배 관련 민원 등을 처리해야 할 관리사무소나 입대의를 설득하는 과정도 필요했다. 
이승희 씨는 “입대의가 지자체를 이해시키는 데 큰 힘이 돼줬으며 관리사무소 역시 민원발생 등에 대해 잘 대응해주고 있어 무사히 정착되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원칙 지키는 것이 좋은 제도를 유지하는 길”

최 소장은 2000년도 부임 이후 두 번에 걸쳐 상계주공14단지를 떠났다가 다시 돌아왔다. 두 번째 부임한 시기는 2006년경, 세 번째 부임한 시기는 2013년경으로, 돌아올 때마다 처음의 취지를 잃고 비정상적으로 운영되는 공동체 시설이나 관리규정을 벗어나 운영되는 관리행정 등을 보며 안타까웠다고 설명한다. 
특히 최 소장이 퇴직한 이후 작은도서관은 일부 입주민들의 욕심으로 헌책이 아닌 소수의 입맛에 맞는 새 책으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도서관을 이용하는 입주민은 하루 5명 이내로 줄어들고 개방시간도 1~2시간 이내로 짧아졌다. 이에 반해 새 책이 많아지자 도서 관리에는 더 많은 인력이 필요해져 도서관 관리인단까지 생겨났다. 어떤 날은 방문한 입주민 수보다 관리인단 수가 더 많거나, 이용자가 없어 도서관 문을 열지 않는 날도 생겼다. 당연히 노원구청의 도서구입비 지원도 중단됐다.
이런 상황을 정상화하기 위해 최 소장은 뜻이 맞는 동대표들과 함께 가장 먼저 도서관 관리인단을 해체시키고 다시 헌책을 수거해 도서 종류를 늘리기 시작했다. 운영시간도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고정적으로 개방해 입주민들이 자유롭게 이용하도록 만들었다. 이에 노원구청도 중단했던 지원을 다시 시작했다.   
최 소장은 이러한 일들을 겪으며 “제아무리 좋은 제도도 본래의 취지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면 운영 목적을 잃게 돼 결국 망가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느꼈다”면서 “특히 한 가구가 욕심을 내면 다른 가구에 고스란히 피해가 전가되는 공동주택의 특성을 최대한 완충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들고, 이를 원칙대로 운영해 본래의 취지를 지키는 것이 관리의 최대 목표”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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