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세상

바퀴벌레 한 마리가 텔레비전 화면에 등장한다. 가느다란 더듬이는 안테나처럼 움직이고 빛을 받은 몸에서는 윤기가 흐른다. 병균을 옮긴다는 정보가 들어오기 전에는 어딜 봐도 바퀴벌레를 혐오할 이유는 없다. 그의 몸 색깔은 윤기가 나는 붉은 커피색이라 내 머리카락 색이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해충이라는 교육을 받고부터 모든 사람들은 그 벌레를 혐오스러운 생명체의 대표급으로 취급한다. 오죽 혐오스러우면 욕 대신 바퀴벌레에 빗댈까. 미운 사람을 일컬어 멍게, 해삼, 불가사리라 부르더니 그들의 증오심을 뛰어넘는다. 그도 그럴 것이 잡식성에다 군집력을 가져서 그가 한번 자리를 잡으면 좀체 박멸하기가 어렵다. 
일반 주택에서는 습하고 따뜻한 곳에 서식하는 경향이 있어 전기밥솥이나 냉장고 아래 살기도 하지만 밤에만 쏟아져 나와 활동해 잘 들키지도 않는다. 그들은 사무실에서도 잘 살아간다. 잉크물도 먹고 과자 부스러기도 먹는다. 사람 먹을 것은 없어도 그들 먹을 것은 많다.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 바퀴벌레 퇴치를 하다 보니 요새는 바퀴벌레 보기가 드물다.  바퀴벌레의 천적도 바퀴벌레 못지않게  비주얼이 혐오스럽다. 가는 다리가 자그마치 28개에서 30개 정도로, 몸체가 길고 유연한 그리마인데 흔히 돈벌레라고 불린다. 그래서 바퀴벌레가 있는 곳에 천적인 그리마가 있으므로 그들은 동시에 발견되기도 한다. 
원래 남쪽 나라에서 온 벌레라서 난방이 잘 되는 곳에서  발견되기도 해 부잣집에서 서식하고 돈 주변에서 보이는 경우가 있어 ‘돈벌레’로 불리게 돼 징그럽지만 그리마는 미워할 수 없는 익충이다. 바퀴벌레는 지나다니는 길에 먹이, 물, 은신처를 화학물질로 표시해 저들끼리의 길을 만든다.   
나에게 바퀴벌레는 병균을 옮기는 해충이기 이전에 놀라운 포식력을 가진 벌레로 인식됐고 도저히 있을 수 없는 현상과 마주치고 나서는 되레 생존력에 감탄해 존경심마저 들었다. 
계몽사에서 디자이너로 일할 때다. 당시 어린이 도서 전문 출판사로 선봉장이 돼 정신없이 책을 만들어 낼 때다. 어린이 그림책에 끼워 파는 동요 음반의 케이스를 디자인해 포스터컬라로 ‘어린 음악대’라고 써서 칠해 두고 퇴근했다. 다음 날 아침,  전날 작업한 것을 갖고 촬영을 하러 가야 하는데 글자의 포스터컬러가 다 사라졌다. 누가 긁은 것도 아니고 붓으로 닦아낸 것도 아니다. 썼던 흔적만 엷게 보인다. 모두가 들여다보면서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고만 했다.
똑같은 작업을 두 번 하기가 얼마나 약 오른 일인가. 레터링 작업은 유난히 신경이 쓰인다. 다시 쓰려고 하니 은근히 부아가 나고 약이 올라서 누가 그랬는지 찾고 싶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사람이 한 일 같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화학변화라고 보기도 어려웠다. 서고로 들어가 냉커피를 한 잔 들이키고 다시 책상에 앉아 작업을 하려고 서랍을 열자 거기에 채송화씨 같은 색색의 알갱이가 소복하게 모여 있다. 바퀴벌레의 똥이다. 그들은 진실하다. 먹은 것을 진실하게 내놓아서 자수를 강요하지는 않는다. 그것을 발견하고는 바퀴벌레가 더럽지 않고 귀여웠다. 
나는 심심하면 그 바퀴벌레 생각이 난다. 그 당시에는 한 마리가 밤새 쪼았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상상이 증폭되면서 몇 마리가 들러붙어 쪼아 먹었을까, 몇 시간 만에 해치웠을까 상상하게 됐다. 아무튼 동화를 다루다 보니 내가 동화 속에서 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어떻게 그 많은 포스터컬러를  밤새 작은 빨판으로 쪼아서 다 먹었을까. 
지금 생각해보니 학자들이 바퀴벌레는 먹이를 필요 이상으로 최대한 먹은 후 자신들의 일족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 다시 토해내며 이를 다른 바퀴벌레들이 먹도록 한다는데 그날 내 서랍에서 본 것은 무엇이었을까.  아무튼 나는 그들의 생존력이 존경스러웠다. 지구가 생기고 가장 오래도록 살아남아 있는 벌레라고 하는데, 충분히 긍정하게 된다. 바퀴벌레를 사육해 먹거리로 사용하는 종족도 있다고 하니 서식지의 위생만 지켜진다면 번식력이 뛰어나서 충분하리란 생각도 해본다. 
나는 그 바퀴벌레를 만나고부터 일 처리하는 능력에 그들이 사는 법을 도입했다. 바퀴벌레도 하는데 그것을 못하겠느냐고 나를 다그치기도 했다. 무엇이든 단칼에 베어내려고 들거나 단번에 이루려는 생각을 지웠다. 밤새 쪼고 빨아서 그 큰 글자에 얹힌 포스터 컬러를 다 먹어치우듯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을 내 것으로 만들자고 들면 버거움이나 두려움이 덜할 것 같았다. 지식이 모자라도 바퀴벌레 정신으로 접근해 습득하고, 일 능력이 모자라도 그렇게 처리하면 되리라고 믿고 살아왔다.  
심지어 두꺼운 성서를 읽어가는데도 야금야금 읽다 보면 끝장이 보이겠지, 그러면서 읽었다. 타고난 능력에 개미와 바퀴벌레의 부지런함만 배워도 사는 게 덜 수고로울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몸집에 비하면 ‘어린 음악대’란 글자는 실로 어마어마하게 컸으므로 나는 안다. 
“지금 너는 어느 글자를 쪼고 있느냐”고  나에게 묻는다. 

오 정 순  수필가

 

 

저작권자 © 한국아파트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