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설

‘자유’는 양면성을 가진 말이다.
그 무엇으로부터 구속받지 않고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태를 뜻하기도 하지만, 인간에게 무한 자유가 주어졌을 때, 강자와 약자의 자유, 부자와 빈자의 자유는 같은 크기로 보장받을 수 없다.
강자가 자유롭게 자신의 힘을 휘두르면 약자의 자유를 침해하게 되고, 부자가 무한대의 이익을 추구할 때 빈자는 생존을 걱정할 처지로 내몰리게 된다.
‘자유’는 우리 사회에서 더욱 이중적으로 다가온다.
조선이라는 봉건국가가 사라진 뒤에도 일본제국주의에 이어진 군사독재의 억압 속에서 시민의 자유는 단 한 번도 제대로 보장된 적이 없었다.
1980년대까지 ‘자유’는 억압과 굴종에서 벗어나기 위한 진보적 가치를 담고 있었다. 그렇다보니 많은 사람들이 자유주의를 진보의 개념으로 생각하지만, 자유주의는 원래 보수의 기치다. 기본권이 없는 사회에선 자유주의도 혁명적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6월 항쟁 이후 우리 사회에 최소한의 시민권적 자유가 주어지긴 했으나, 자본과 노동의 관점에서 볼 때 노동자들은 아직도 많은 제약 속에 제대로 된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1980년대까지 별 차이가 없었던 대기업 노동자와 중소기업 노동자의 처지는 1987년 노동자 대투쟁 이후 조금씩 벌어지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하늘과 땅 차이가 됐다. 대기업 노동자가 소기업 사장보다 먹고 살기 편한 세상이다.
하지만 그런 대기업 노동자라고 해도 자본의 위력 앞에선 고양이 앞의 쥐 신세다. GM의 철수 엄포 한마디에 여기저기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는 대우자동차 노조가 증명한다.
하물며 중소기업 노동자의 신세야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언론은 우리 경제를 노조가 쥐락펴락하고 있는 것처럼 보도하지만, 고용노동부 자료에 의하면 2015년 한국의 노조 조직률은 10.2%에 불과하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하위권이다.
이 중 공무원부문 66.3%, 교원부문이 14.6%다. 이들이 통계치를 끌어 올렸다. 일반노동자의 관점에서 보면 10%대의 조직률조차 착시에 불과하다.
사업장 규모별 조직률은 노동자 300명 이상이 62.9%인 데 반해 30~99명인 경우엔 2.7%였다.
결국 일부 대기업 노조가 자기 목소리를 내고 있을 뿐 대부분의 중소기업 노동자들은 자력으로 노조조차 결성하지 못하는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것이다.
이런 현실에서 약자의 자유는 없다. 경제적 약자는 경제적 강자가 제시하는 계약조건에 따라 계약을 체결할 수밖에 없다. 노동에 있어 계약의 자유는 자본의 횡포 속에 사업자를 위한 계약이 되고 만다.
그래서 법이 중요하고 원칙이 필요하다. 사회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선 계약자유의 원칙에 제한을 가할 수밖에 없다.
한 아파트에서 일하던 관리사무소장이 “입주자대표회의에서 근로계약을 갱신하지 않기로 의결했으며 근로계약기간 만료로 근로계약이 종료됐다”는 이유로 쫓겨났다가 소송을 제기해 항소심까지 승소했다.(관련기사 1면)
이렇게 기본권적인 문제로 소송까지 간다는 현실이 개탄스럽지만, 아파트 노동자들이 처한 현실이 얼마나 팍팍한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법을 무시한 채 목소리만 큰 입주민 몇몇에 의해 관리업무가 좌지우지되는 건 전체 입주민에게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그런 사람일수록 직원들을 사적으로 부리려는 이기적 태도가 더 많이 나타난다.
우리 사회 일각에서 보이는 ‘자칭’ 자유주의는 근대적 의미의 자유와 동떨어져 있다.
‘자유론’의 저자 존 스튜어트 밀은 모든 계약자유의 허용을 주장하면서도 ‘노예가 되는 계약’과 ‘제3자에게 피해가 돌아가는 계약’은 예외적으로 금지해야 한다고 했다.
자유론은 1859년에 출간됐다. 밀은 이미 19세기에 여성억압과 강자의 무한자유를 반대했다.
힘을 가진 입장일수록 스스로 힘의 남용을 경계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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