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설

 

 

한 지역에 아파트 단지가 건설되고 입주시점이 다가오면 인근 금융기관들에 비상이 걸린다. 관리비 계좌를 유치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하기 때문이다.
아파트 명의의 계좌가 한번 개설되고 나면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아파트가 소멸될 때까지 수 십 년 동안 그 은행, 그 지점의 평생고객이 된다.
이 뿐 아니다. 입주민이 관리비를 이체하기 위해선 그 은행지점의 통장을 개설해야 하므로 대다수 입주민들이 주거래 은행을 바꾸게 된다. 주거래 은행이 정해지면 이에 따라서 가족들의 급여 통장을 옮기거나 새로 개설하고, 신용카드와 체크카드를 만들 수도 있으며 적금에 가입하고 학원비, 통신요금 등 각종 사용료를 이체할 뿐만 아니라 보험까지 가입할 수도 있다.
이런 부대효과를 감안하면 한 아파트 단지의 관리비 계좌 개설은 은행에 ‘황금알을 낳는 거위’와 다름없다.
이렇듯 어마어마한 파급력을 갖고 있기에 중소형 신규 아파트 단지엔 부지점장급이, 대형 단지엔 지점장급이 아파트를 찾아다니며 공들이기에 여념이 없다.
보통 한 아파트의 관리비 계좌는 입주민 편의를 위해 단지에서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 2~3개  은행에 개설한다. 또 장기수선충당금은 별도의 계좌에 따로 예치 및 관리하도록 돼 있고 자주 인출할 일이 없어 이자가 좀 더 센 적금을 들기도 해서 통장이 대 여섯 개에 이르는 단지도 있다. 대규모 아파트의 경우 통장에 수 십 억원씩 보관돼 있다.
그렇다면 이들 통장의 안전은 확실히 담보되고 있을까?
그러나 입주민들의 믿음과 달리 관리비 통장의 보안이 의외로 허술하다. 특히 통장의 핵심인 인감도장과 관련해 구멍이 도처에 숭숭 뚫려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관련기사 1면>
수도권의 모 아파트에서 분란이 일어나 입주자대표회의가 두 개나 존재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양쪽이 모두 자신들의 정통성을 주장하고 있어 법적 판단이 어떻게 귀결될지 주목된다.
이런 와중에 관리비 통장의 인감이 관리사무소도 모르게 변경됐다.
관할 지자체에 입대의 구성신고를 마친 후임 회장이 수리통지서를 세무서에 제시한 후 아파트 사업자등록증상의 대표자를 자신의 이름으로 바꿨다. 그는 바뀐 사업자등록증을 가지고 시중 3개 은행에 분산된 관리비 계좌의 인감도장을 모두 자신의 것으로 변경했다. 그러는 동안 인감도장을 갖고 있던 전임 회장도, 관리비 통장을 보관하고 있던 관리사무소도 이런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 공동주택관리법 시행령 제23조 제7항엔 ‘관리비 계좌는 관리사무소장의 직인 외에 입대의 회장 인감을 복수로 등록할 수 있다’고 나와 있다. 소장의 도장은 기본사항이고, 회장의 도장은 임의사항인 것이다.
그런데 관리현장에선 이런 법 규정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다. 오히려 현실은 정반대다. 주민대표들이 회장 인감을 기본으로 알고 있어서 소장 인감은 아예 등록조차 되지 않은 통장이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입대의는 개인이 아니고, 대표자도 2~4년에 한 번씩 바뀌므로 은행에서 이를 확인하기란 쉽지 않다. 게다가 공동주택관리법 조항을 모르는 은행원이 태반이어서 관련서류만 제출하면 손쉽게 도장을 바꿀 수 있다. 누군가 작정하고 덤벼들면 허위서류로 인감을 변경하고 거액의 관리비를 인출하는 사기극을 벌이는 게 전혀 불가능하지 않은 상태다.
아직 늦지 않았다. 큰 일이 벌어지기 전에 관련 법 규정을 강력하고 명확하게 보완해야 한다.
작은 물구멍을 방치하면 나중에 둑이 무너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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