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용수의 에세이


 

 

천하장사의 들배지기도, 아가의 첫걸음마도, 제자리에서 보다 큰 전진을 위하여 숨고르기를 하는 제자리걸음.
그리움을 안고 기다림으로 정지된 것이 아니다.
제자리걸음은 움직이지 않는 것이 아니다. 자기가 선 그 자리에서 움직이는 것이다. 제자리걸음이 어디 다리로 걷는 것만이더냐.
큰 사랑도 제자리걸음에서 머뭇거리며 숨죽이며 출발하는 것이 아닐까.
100m의 주자도 제자리에서 열심히 뛰어보고 스타트라인으로 가는 걸 나는 보았다. 제자리걸음은 준비의 기본자세다. 제자리걸음은 축적이다. 제자리걸음은 도약이요, 희망을 위한 선봉장이다.
어머니는 늘 그 자리에서 그냥 그대로 제자리걸음이다.
왜 자식을 사랑하느냐고 물으면 그냥이란다.
이유가 없고 까닭이 없고, 거래가 없고 손익이 없는 사랑의 제자리걸음.
마지막 재가 바람에 날린다 해도 제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 모닥불 같은 사랑이다. 저 넓은 화엄의 세계에서 미동도 하지 않는 화두가 깨달음으로 가는 제자리걸음.
기다림이란, 그리움이란 사랑 때문이다.
제자리에 서 있는 망부석이, 불망비가 사랑이 아니더냐.
태종대의 모자상도, 만날고개의 모녀상도, 사랑 때문에 제자리걸음이다.
청출어람(靑出於藍), 후생가외(後生可畏)란 말을 엊그제 배운 것 같은데 흰머리는 멀리에 있지 않고, 또 한 해가 가려고 한다.
석가의 자비도, 예수의 사랑도, 공자의 인의(仁義)도, 묵자의 겸애(兼愛)도, 세월 아무리 흘러도 언제나 그 자리에서 느긋한데 나의 제자리걸음은 왜 이리 바쁠까. 누군가가 찾아올 사람도 없는데 배고픈 겨울 사슴들이 산을 내려오는 발걸음처럼 두리번거리는 이 제자리걸음.
미워졌다고 갈 수도 없다. 행여나 찾아올까봐. 진미령의 ‘미운 사랑’이 제자리걸음이 아닐까.

남몰래 기다리다가 가슴만 태우는 사랑/어제는 기다림에 오늘은 외로움 그리움에 적셔진 긴 세월/ 이렇게 살라고 인연을 맺었나/차라리 저 멀리 둘 걸/미워졌다고 갈 수 있나요 행여나 찾아 올까봐/가슴이 사랑을 잊지 못해 이별로 끝난다 해도/그 끈을 놓을 순 없어 너와 나 운명인 거야

2018 새해다.
무술년 황금 개띠다.
충직하여 주인의 생명까지도 구하는 우리들의 반려동물.
얼굴 없는 천사가 아니더라도 시린 손 마주잡고, 모두가 다 견공처럼 제자리를 지켜 모닥불 같은 따뜻한 무술년이 되었으면 좋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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