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세상

 

 

오 정 순  수필가


파란 하늘에 뭉게구름이 두둥실, 미세먼지로 얼룩졌던 하늘의 기미를 여름내 빗물로 닦아내고 하늘이 말쑥하게 거듭났다. 이런 하늘을 배경으로 코스모스가 하늘거리고 그 풍경은 기억 한 조각을 몰고 왔다.
‘몽실국장’이 생각났다. 이름이 ‘몽섭’인데 여직원들이 그렇게 불렀다. 키가 작고 전체적으로 둥근 이미지라서 이름자와 어울리게 ‘몽실 국장’이란 별칭이 붙었다. 성정이 부드럽고 웃는 인상이라 뭉글뭉글 피어오르는 뭉게구름 이미지라 그 분이 생각났는가 보다. 그 분은 나에게 값진 기억을 만들어 준 분으로 ‘얼떨결에 만난 참 어른’이다.    
자식은 언제부터 어머니에게 어른으로 보일까.
90노모는 70을 눈앞에 둔 효자 아들을 향한 애정이 한 없이 부자연스럽다. 자신의 삶에서 자식을 자유롭게 떼어놓지 못한다. 늘 자식 걱정을 입에 달고 살지만 실은 자신의 걱정이다.
인격적 분리가 안된 모자는 자식이 어른이 돼도 오히려 어머니가 분리 불안을 지병처럼 끌어안고 살아간다. 애착이 정도를 넘어도 고생하고 헌신하며 자식을 키운 어머니라 대놓고 거절을 못하는 자식들이 많다.
나는 언제부터 어른이었을까.
내가 존경한 어른은 나를 하나의 성숙한 인격체로 대해주고, 가진 능력만큼 인정해주고, 성별 구분 없이 인격자로 예우해준 분들이다. 결핍에서 피어난 요구였을 것이다. 
맏이인 나는 어른이 되었어도 부모에게는 약한 아이였다. 아니 어른의 품에서 벗어날까봐 늘 두려웠던 것 같다. 오히려 어머니가 더 불안했던 것 같다. 어머니는 자신의 몸이 부서져도 자식들 몸을 편하게 해주고, 무엇이든 대신해 주는 게 사랑이라고 이해했다. 만사를 의존하게 조건을 만들어갔다. 홀로 설까봐 걱정되는 분처럼 공부 외에는 자식들의 대리 인생을 살았다.
그러자니 통제가 심했다. 나에게 밤길은 다녀서는 안 되는 거리였다. 나는 숨이 막혀도 소리 없이 저항하면서 늘 벗어나고파 노래를 불렀다.
내 어머니는 학교 선생님에게도 내 자식을 맡긴다고 그랬고, 직장 상사에게도 귀한 여식을 전당포에 보물을 맡기듯 맡기니 잘 봐달라는 부탁을 서슴지 않았다. 아파트 경비원에게도 우리 가족을 오가며 잘 돌봐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그런 어머니와 늘 생각이 부딪쳤지만 드러내지 못하고 나이가 들었다.  초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어머니가 학교에 오는 것이 못마땅했고 어머니가 선생님에게 잘못한 것이 없는데 당당하지 못한 자세로 굽실거리는 것이 싫었다. 학교 규칙을 잘 지키고 공부를 충실히 하고 다니는데 왜 자꾸 찾아와서 부탁을 하고 그래야만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어쩌면 어머니는 그러한 어머니가 이상적인 어머니상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어머니는 대가족의 종손 집에서 장손과 같이 자란 딸이라 남동생과 조카를 한 집에서 키울 때 조력자로 성장하다가 19세에 결혼을 하여 어머니가 되었다. 돌보는 대상에서 자신을 배제한 어머니의 인생을 생각하면 아무도 그 어떤 말도 하지 못한다. 헌신과 희생을 일삼으며 극진히 자식을 돌보았기에 어머니가 요구하면 무엇이라도 드러내놓고 거절하기가 힘들었다.
25세, 능력을 인정받아 직장을 옮겨갔다. 남들은 결혼을 하고 아이엄마가 되는 나이인데도 내 어머니는 직장상사에게 자신의 딸을 부탁하면서 밥을 한 끼 대접해야 한다고 날을 잡아보라고 성화였다. 하는 수 없이 ‘몽실국장’에게 말을 건넸다.
“어허, 몇 살이요. 이렇게 일 잘 하는 오선생을 우리 직장에 보내주셔서 고맙다고 우리가 밥을 사드려야 하는데 그런 생각을 하지 말라고 전해 주세요.”
나는 그동안 자라지 못한 인격의 키가 훌쩍 크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그날 비로소 ‘몽실국장’의 힘을 빌어 어른이 되었다. 밥 한 그릇에 어른됨을 팔지 않은 몽실국장에게 뭉게구름 둥둥 떠가는 가을 하늘에 대고 손 편지를 쓴다.
“몽실국장님,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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