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수의 문화답사


 

 

◈의암-경상남도 기념물 제235호
의암은 임진왜란 때 논개가 순국한 바위를 말한다. 조선 선조 26년(1593) 6월 29일(음력) 임진왜란 제2차 진주성전투에서 진주성이 함락되고 7만여 명의 민·관·군이 순절하자 논개가 의암에서 왜장을 끌어안고 남강에 투신해 순국했다.
이에 논개의 의열(義烈)을 기리고자 진주의 선비와 백성들은 이 바위를 ‘의로운 바위’즉 의암이라 부르게 됐다. 인조 7년(1629) 정대륭이 바위의 벽면에 의암이라는 글자를 새겼다. 위험한 바위라 해 위암(危巖)이라 불리기도 했다.

바람도 없는/ 강물이/ 어깨를 흔들고// 촉석루 의암에 앉아/ 처절했던 그날을 들어본다// 매화꽃처럼 희었을까/ 산수유처럼 놀라지는 않았을까/ 진주성 동백처럼 낭자하게 붉었을까// 한 맺힌 피울음 토하며/ 꽃잎 지는 설움이 저토록 고왔을까/ 더는 아름다울 수 없는/ 죽음이여/ 살아 있는 죽음이여!// 어쩔 수 없이/ 오늘은 몹시/ 마음이 부끄러운 날이다.   -박영수 ‘마음이 부끄러운 날’ 전문

◈의기사-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7호
의기사는 조선 선조 26년(1593) 왜장을 껴안고 남강에 투신해 순국한 논개의 넋을 기리기 위해 논개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순국한 바위에 새긴 의암이라는 글자는 인조 7년(1629)에 진주의 선비 정대륭이 새겼고 효종 2년 양곡 오두인은 의암기를 지어 촉석루에 현판했으며, 경종 2년에는 명암 정식이 의기사를 창건하고 ‘의기논개지위’라는 위패를 봉안했으며 ‘의암사적비’에는 비각을 세워 ‘의기논개지문’이라는 현판을 달았다.
한말 진주기생 산홍은 황현의 매천야록 광무 10년(1906)조에 나온다. 매국노 이지용의 수청을 거절한 것으로 유명하다.
후일 산홍은 논개의 사당 의기사를 참배하고 ‘의기사감음’이라는 시 한수를 남기기도 한다.
양회갑은 기녀 산홍이 ‘나라 판 도적의 죄를 나무라며 잠자리를 거절하고 스스로 죽다’라는 제목으로 한시를 지었다. 기생이면서 진주의 기상을 드높인 산홍을 기려 진주 출신의 작곡가 이재호(1919~1960)는 1940년 태평레코드사를 통해 ‘세세년년’이란 곡을 발표했다.

산홍아 너만 가고 나는 혼자버리기냐/ 너 없는 내 가슴은 눈 오는 벌판이다/ 달 없는 사막이다 불 꺼진 항구다.

◈촉석루-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8호
진주 남강 벼랑 위에 세워진 촉석루는 진주의 상징이다. 촉석루가 만들어진 때는 고려 고종 28년(1241) 진주목사 김지대(영헌공으로 청도 김씨의 시조이기도 함)가 창건한 후 여러 차례 고쳐 지었다. 촉석루라는 이름은 ‘강 가운데 돌이 우뚝 솟은 까닭’에 누의 이름을 촉석이라 했다고 전한다.
촉석루는 진주성의 남장대로 장원루라 부르기도 한다. 전시에는 진주성을 지키는 지휘본부였고, 평화로운 시절에는 시인 묵객들이 풍류를 즐기던 명소로, 또 과거를 치르는 고사장으로 쓰이기도 했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국보 제276호로 지정됐지만 전쟁 때 불탄 것을 진주 시민들이 진주고적보존회를 만들어 국비, 도비, 시비와 시민 성금으로 1960년 옛 모습을 되찾게 됐다.
촉석루 현판 중 북쪽의 것은 영조 때의 명필 송하 조윤형이 썼으며 남쪽은 유당 정현복, 남장대는 은초 정명수의 글씨이고 영남제일형승(嶺南第一形勝)이라는 글씨는 청남 오제봉의 글씨다.
논개의 순절 이야기로 더욱 유명해진 이곳은 지금에 와서는 진주 시민은 물론 타지의 많은 관광객들이 찾는 진주 제일의 관광명소로 자리매김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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