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수의 문화답사


 

▲진주성에서 바라본 남강
 

6월 스무날, 왜군의 선봉이 성 경계에 이르자 오유, 이잠 등은 성에서 나가 적의 정세를 살피고 몇 놈의 수급(首級)을 가지고 돌아오니 우리 편 군사의 사기가 높아졌다.
이튿날 약 5만명의 적의 대부대가 성을 세 겹으로 에워싸고 성 아래에 들이닥쳐 큰 대를 엮어 세우고 그 안에서 총을 발사하니 탄환이 비오듯 했다. 성내에서도 힘을 다해 이를 무찌르니 적은 또 밤중에 동문으로 돌아 함성을 크게 지르면서 성으로 기어오르므로 황진 등이 힘써 이를 격퇴했다.
하루는 적군이 갑자기 성의 서북쪽을 공격해 위기에 처하기도 했으나 황진 등이 칼을 휘두르며 제장을 독려해 기어코 적을 물리쳤다. 적이 또 토산을 쌓고 그 위에 올라 성을 내려다보며 칠 때 황진 등은 다시 높은 언덕을 쌓아 이에 대항했고 또 적이 큰 나무 위에 판옥을 짓고 불을 던져 성안의 가옥이 탈 때 우리 편은 대포를 쏘아 판옥을 분쇄했다. 그러나 연일 쏟아지는 비로 성 한모퉁이가 무너지자 적은 그 틈을 타고 공격했다. 김준민이 힘껏 싸웠으나 끝내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 다음에 성 동서에 적이 다섯 군데의 높은 언덕을 쌓고 그 위에 책(柵)을 세워 총을 쏘니 강희보는 총에 맞아 죽고, 황진 등이 이에 화전을 쏘아 책을 불살랐다.
적은 또 관 모양의 큰 궤를 만들어 쇠가죽으로 여러 겹 싸서 사륜거 위에 놓고 갑옷 입은 자가 그것을 끌고 성으로 기어올라 성을 파괴하자 황진이 횃불에 기름을 부어 그것을 태워 버렸다.
그 뒤 적이 몰래 기어들어와 성에 구멍을 뚫으려 했으나 사력을 다해 방어하니 적의 괴수 한 놈은 총에 맞아 죽고 그 밖의 적병의 죽은 자가 천여 명이나 돼 그들은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때 황진이 성에 올라가 진지를 시찰하다가 홀연 적의 총탄에 왼쪽 이마를 맞아 비장한 죽음을 당하자 즉시 장윤으로 그를 대신했으나 그 또한 곧 전사했다.
황진은 앞서 난리가 일어나기 전에 군관으로 통신사를 따라 일본에 갔다 돌아와 적의 동태에 대해 황윤길(황윤길은 김성일과 달리 풍신수길이 전쟁을 도모할 것이라 보고했음)과 의견을 같이 했으며 진주성 제2차 공방전 당시 그의 지용과 탁월한 공은 제장들 중에 가장 뛰어났다. 그의 전사는 병사들의 사기를 매우 저하시켰고 또 성의 장래를 비운에 빠지게 했다.
동문의 성이 비로 인해 무너지자 적병들이 개미떼 같이 달라붙어 올라오니 이종인이 고전분투해 간신히 물리쳤다. 미구에 적군의 정예가 북문에서 칼을 휘두르며 사다리를 타고 넘어 들어오자 목사 서예원이 먼저 달아나고 지키던 군사들이 흩어져 도망쳤다.
이종인, 이잠, 강희열 등 10여 명은 칼을 휘두르며 적병을 맞아 싸우다가 힘을 다해 죽었다. 종인은 죽을 때 적병 한 놈씩을 좌우편 허벅지에 끼고 강물로 뛰어들며 크게 소리치길 “김해부사 이종인이 여기서 죽노라” 했다.
김천일 등은 그 아들 상건과 고종후 부자와 최경회 등 수십 명과 더불어 북향재배한 뒤 남강에 투신해 죽었다.
6월 29일 성이 함락되자 군·관·민이 모두 도륙당하고 소·말·닭·개까지도 남아나지 않을 정도로 적의 행패가 심했다고 한다.
이상의 사실은 적병에게 붙들렸다 도망쳐 나온 사람들의 보고에 의해서 확인된 것이다. 이 진주성의 혈전이야말로 조선의 혼을 유감 없이 발휘한 역사상 일대 금자탑이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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