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용수의 에세이

 

 


신발은 역사다. 맨발에서 시작하여 신발을 신으면서 인간의 역사는 빠르게 진화를 시작하였으리라. 수많은 날짐승과 들짐승이 있어도 신발을 신은 걸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 그래서 신발은 인간의 자존심인지도 모른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구속이 있다면 신발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평화로운 자유가 있다면 신발이다. 내 것이라고 등기필증을 하지 않아도 언제나 나와 함께 동행하는 신발.
맨 아래에서 온갖 고초를 겪어도 내색하지 않는 보현보살 같은 신발. 직업 따라, 계절 따라, 날씨 따라, 용도에 따라 수많은 종류의 신발.
무거운 쇳덩이에도 끄떡없는 안전화, 비가 오면 장화요, 눈이 오면 설화다. 산을 가면 등산화, 집에 오면 실내화, 운동을 하면 운동화.
인간의 생애에 첫 날갯짓은 꼬까신이라는 신발에서부터다. 꼬까신, 아동화, 학생화, 캐쥬얼화, 스포츠화, 신사화, 숙녀화…. 인간의 성장에 따라 신발의 변천사가 시작되고, 인간의 목적에 따라 신발이 향하는 방향이 다양하다. 짚신과 고무신에서 최고급 가죽구두로 이어지면서 인간의 욕망은 하이힐의 높이처럼 부츠의 길이처럼 어디가 끝인지를 모르고, 신발에 얽힌 이야기도 많다.
신데렐라의 유리구두, 카렌의 빨간 구두, 장화 신은 고양이, 간디의 신발 한 짝, 미국의 제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의 아버지 토마스 링컨은 신발을 만드는 사람이었다지.
자신의 인생 역정을 고스란히 간직한 작품이, 빈센트 반 고흐의 신발들뿐이겠는가. 우리 모두는 삶의 애환과 고단한 삶의 무게에 짓눌린 신발을 신고 있다. 우리 모두는 신발을 신으면서 소리 없는 아우성이 시작된다.
농부가, 어부가 신발을 신으면서 대지와 바다와의 싸움이 시작된다.
바다에서, 하늘에서, 땅에서, 우리들을 수호하는 천사는 신발이다.
우주의 원초적인 조화의 주문이라는 태을주가, 모든 업보와 죄보가 소멸된다는 광명진언이, 모든 재앙을 물리치고 좋은 일만 있게 해주는 길상다라니가, 신발이 하기 나름이라는 신발의 사용설명서가 아닐는지.
어제 저녁에 어디를 갔다 왔는지 신발은 알고 있다고 한다.
우리 인생의 지나온 발자취라는 궤적은 결국 신발이 남긴 흔적이다.
어쩌면 신발은 암호해독기라는 콜로서스인지도 모르겠다.
밑창이 닳아버린 낡은 구두는 세월이 빼앗아간 삶의 표시라고 암호를 푼다. 사푼사푼 이야기를 만들고 자박자박 스토리를 만드는 신발.
눈물과 웃음과, 행복과 불행을 같이 하면서 새로운 나침반이 되는 아버지의 신발은 삼천대천세계를 뛰어넘는 우주법계의 화엄경이다.
역사를 보라. 수많은 전쟁을 치렀던 아버지, 그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나 다시 천지창조를 꿈꾸는 아버지. 아버지의 신발은 아버지의 꿈이요, 아버지의 의지요, 아버지의 결단이다. 뒤축 없는 모카신을 신어도 하늘을 휘어잡고 바다를 거머쥐는 아버지의 신발은 가슴 벅찬 환희다.
나의 아버지는 평생 양복을 한 번 입어보지 못하고, 구두를 한 번 신어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의 하얀 고무신이 7월의 하얀 연꽃처럼, 하얀 치자 꽃처럼 내 기억에서 빛나고 있다.
나는 지금 검정고무신도 하얀 고무신도 한 켤레 없다.
공급이 수요를 창출한다는 세이의 법칙처럼, 오늘도 새로운 신발들이 쏟아지고 있으니, 그 옛날 그토록 부러워하던 운동화와 등산화와 반짝반짝 빛나는 구두가 즐비하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파도가 치고 바람이 불고 눈, 비가 내리는 날이 많다 해도 신발만큼은 벗겨지지 않도록 꽉 조여 매어야 하리. 등산화가 되었든, 작업화가 되었든, 헌 구두가 되었든. 신발은 아버지의 자존심이다. 그래서 신발은 깨끗하게 존중되어야 한다.
다만 내 발에 맞지 않는 신발은 억지로의 행복보다 불편하니 내 발에 맞는 신발을 신어야겠다. 발에 맞지 않는 구두를 신기 위해 자신의 뒤꿈치를 잘라낸 신데렐라를 우리는 알고 있다. 일체감, 안정감, 만족감, 쾌적감이 평화요, 행복이요, 사랑이 아니더냐. 아버지의 신발 밑창은 마약을 숨기는 것이 아니라 윤리와 청렴, 신뢰와 활력을 간직하여 욕망의 외풍을 막아주고 생존의 나침반이 되어야 하리.
만능 여름신발이라는 아쿠와이어 신발이 아니더라도, 아버지가 신발을 신으면 당신 삶이 눈물을 흘려도 전진이다.
아버지의 신발, 그것은 하나님과의 계약이라는 구약성서요, 예수님의 부활이라는 신약성서와 같은 것이 아닐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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