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홀아비바람꽃 Anemone koraiensis Nakai 한국특산식물


꽃이 핀다. 그리고 아득한 기억 속의 그리운 사람처럼 들판 넘어 꽃이 진다.


모 방송에서 억대연봉 부럽지 않은 연금 노래 순위를 공개했다. 봄이면 노래 차트 상위 순위인 버스커버스커의 ‘벚꽃엔딩’을 제치고 “아무 말 못했던 이름도 몰랐던 지나간 날들에 눈물이 흘러 차가운 바람에 숨어 있다 한줄기 햇살에 몸 녹이다 그렇게 너는 또 한 번 내게 온다”는 박효신의 ‘야생화’가 1위를 차지했다. 팍팍이 메마른 도시에도 변화가 온다. 자고 일어나면 변하는 녹색의 풍경들. 옥상의 정원에는 여행을 하며 이따금씩 주워온 돌들이 화초와 어우러져 어느 날의 기억들을 살아나게 한다. 동강 물길의 자갈밭을 걷다 물길에 씻긴 뽀얀 얼굴에 달무리를 새긴 돌 하나. 백령도 해변의 포말에 다듬어진 하얀 몽돌에는 유유자적 노를 젓는 뱃사공이 여유롭다. 계절이 지나면 무성한 잎들에 돌들은 파묻히고 다시 봄이 되어서나 파릇한 잎들 속에서 지난 기억들을 끄집어낼까. 다시 시간은 망각의 강처럼 흐른다.

▲ 앵초 Primula sieboldii E. Morren
▲ 선암사 편백나무숲의 매미꽃

그대! 이름 모를 꽃들을 기억하는가.

들꽃을 만나러 가는 날이다. 들꽃을 만나러 가는 날이면 그리운 사람과의 약속시간을 기다리는 듯 설렌다. 꽃대 하나 올린 홀아비바람꽃을 만나는 날이나 깽깽이풀, 바람꽃이 봄바람에 흔들리는 날. 생강꽃 향기처럼 홀연히 아득한 첫사랑이 아무런 이유 없이 들판으로 사라진 기억으로 떠오른다. 미세먼지가 날씨를 흐려도 꽃들은 각각의 잎을 만들며 숲길에 피었다. 들꽃이 아슴아슴 흔들리는 걷기 좋은 숲길을 간다.

 

▲ 얼레지 Erythronium japonicum (Baker) Decne.

들머리의 숲길과 아름다운 아치형 돌다리 승선교와 절집의 풍모가 빼어난 선암사.
선암사 원통전, 각황전을 지나 운수암으로 오르는 담장에는 수백 년이나 된 매화 50주 정도가 담장을 따라 심어져 선암사의 역사를 말한다. 천연기념물 제488호로 지정된 선암매는 분홍, 백색으로 피어 이른 봄을 알린 후 신록과 함께 찾아 온 들꽃들이 차례로 핀다.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 선암사 해우소로 가서 실컷 울어라”는 정호승의 시가 아니더라도 봄날의 선암사는 서럽도록 아름답다. 바람이 꽃대를 지나며 속삭이고 햇빛은 나뭇잎을 투과하며 밝은 연초록빛이 설렁인다.

▲ 모데미풀 Megaleranthis saniculifolia Ohwi 한국특산식물

송광사로 이어지는 조계산 굴목이재 초입에는 마음을 시원하게 만드는 편백나무와 그 숲에는 노란 꽃들이 한창이다. 꽃의 이름은 매미꽃. 꽃대가 땅에서 바로 올라와 중부지방의 피나물과 차이를 보인다. 피나물처럼 줄기나 잎을 자르면 피 같은 즙이 빨갛게 맺힌다. 노란 꽃망울을 다닥다닥 맺힌 애기똥풀이 꽃처럼 줄기의 즙도 노랗지만 이 아이들은 줄기에서 빨간 즙을 내고 있다. 그리워 행복한 사람, 그리워 우는 사람, 사람들도 사연에 따라 가슴에 쌓이는 것들이 다르듯, 같은 노란 꽃이라도 가슴 속의 사연들에 따라 꽃대는 다른 색깔을 품고 있다. 벌, 나비, 곤충 부르지 않는 꽃 없고, 꽃 피지 않고 열매를 맺는 나무가 없다. 그냥 피는 꽃 없듯이 그냥 살아가는 삶 또한 없을 것이다.

숲길에는 이런저런 사색이 있고 시원한 바람결에 사색마저 사라져 그저 느낌으로 숲길을 걷는다. 봄의 끝자락 연인산 우정능선을 따라 핀 야생화들. 하얀 모데미풀 눈망울 글썽이는 바람 많은 소백산. 맑고 시리도록 차가운 물이 숲을 지나며 한계령풀, 회리바람꽃, 꿩의 바람꽃이 한창인 태백산 당골에는 아직 봄이 머물러 있다.
다도해가 보이는 강진 주작산의 바위마다 해풍에 빨갛게 핀 산철쭉을 시작으로 장수 봉화산은 5월이면 매봉과 치재사이 능선 15만평에 분홍색의 철쭉이 피어 장관을 이룬다. 봄의 꽃들이 지형에 따라 차례로 핀 후 산철쭉이 마지막 불처럼 타오르며 막바지 봄은 짙은 녹색으로 여름이 된다. 남양주 세정사 돌무더기 계곡에 핀 연분홍 앵초꽃대. 대부도 구봉도 바닷가로 이어지는 철따라 산길에 피는 야생화들. 이제 푸른 숲길에는 바람이 풀잎들을 흔들어 새들이 울고 아득한 기억속의 그리운 사람처럼 계절은 들판 넘어 사라진다. 오늘도 그리운 사람을 만나러 그 숲길을 간다.

이 성 영  여행객원기자
ladders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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