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수의 문화답사


 

 

실록으로 엿보는 왕과 비

◈네가 자결하면 종묘사직을 보존할 수 있을 것이다. 어서 자결하라!
영조의 노여움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격해졌다. 땅에 조아린 세자의 이마에선 피가 흘렀다. 영조가 칼을 들고 자결을 재촉하니 세자가 눈물로 용서를 빌었다. 그러나 임금의 노여움은 누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살려만 달라는 세자의 절규를 외면하고 영조는 끝내 명을 내린다.

◈세자를 폐서인으로 삼고 뒤주에 깊이 가두라!
영조실록 38년(1762) 윤 5월 13일의 기록이다. 역사에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사건, 뒤주에 갇힌 사도세자의 비극을 실록은 이렇듯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비극적인 역사의 현장에 사로잡힌 나머지 간과하고 있는 중요한 사실 하나가 있다. 영조에게 사도세자는 세상에 단 하나뿐이었던 아들, 더욱이 대리청정을 시켰을 정도로 기대가 크고 귀하게 여긴 아들이었다는 사실이다.
맏아들 효장세자를 일찍이 여의고 7년간 후사가 없어 애태우던 영조는 마흔둘에 이르러 아들 사도세자를 얻었다. 그러니 영조의 아들 생각은 각별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 즐겁고 기쁜 마음을 어찌 말하랴? 내전에서 아들로 취하고 원자의 호를 정하는 일을 어찌 조금이라도 늦출 수가 있겠는가? 즉시 이를 거행해 종묘와 사직에 고하도록 하라” -영조실록 11년 1월 21일

영조는 아들이 태어난 순간부터 왕위를 물려줄 것을 결심한다. 그리해 조금도 망설임 없이 사도세자가 태어난 이듬해 왕세자로 책봉하고 신하들에게 온 정성을 다해 교육에 힘써줄 것을 부탁한다.
세자가 3세에 이르렀던 영조 13년 ‘세자가 이미 ‘효경’을 읽고 글을 쓸 줄 알았다’는 기록이 실록에 남아 있다. 이때 세자가 썼던 글이 ‘천지왕춘天地王春’이다. 이에 놀란 여러 신하들이 앞다퉈 나와 세자의 글을 하사해 줄 것을 청하니 영조는 기쁜 나머지 ‘네가 주고 싶은 사람을 가리키라’하며 세자의 재간을 보았다고 한다.
후에도 영조는 여러 신하들이 모인 자리에서 세자와 동행해 세자가 쓴 글씨를 신하들에게 나눠 주도록 했다. 영조 역시 아들의 재능을 세상에 알리고 싶은 것은 여느 아버지와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세자의 대리청정은 불행의 씨앗이었다. 노론이 외면한 사도세자의 대리청정이 순탄할 리 없었고, 과도한 정신적 스트레스로 말미암아 괴이한 행동을 부렸던 사도세자는 끝내 영조의 미움을 사게 된다. 결국 사도세자를 뒤주에 갇히게 한 죄목은 이러했다. 정신질환으로 궁녀를 죽인 것, 여승을 궁녀로 만든 것, 그리고 아무도 몰래 20일 동안이나 관서지방을 유람했던 수상한 행동. 그러나 이는 겉으로 드러난 사실일 뿐, 그 이면에는 더욱 무서운 정치적 이유가 도사리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손으로 아들을 처단해야 했던 아버지의 비극 또한 잠들어 있다. 왕과 세자이기 전에 부자 사이였던 두 사람의 스스럼없는 대화가 더욱 가슴 시린 것은 바로 그런 이유다.
 임금이 열 살이 된 세자에게 묻기를 “글을 읽는 것이 좋으냐. 싫으냐?”세자가 한참 동안 있다가 대답하기를 “싫을 때가 많습니다”하자  임금이 말하길 “세자의 이 말은 진실한 말이니 내 마음이 기쁘다”고 했다. -영조실록 20년(1744년) 11월 4일

*뒤주란 쌀, 콩, 팥 등 곡식을 담아 두는 세간을 일컫는 말이다. 재료는 회화나무가 가장 좋으며 두꺼운 통판으로 듬직하게 궤짝처럼 짜고 4기둥에는 짧은 발이 달려 있다. 뚜껑은 위로 제쳐서 열 수 있고 무쇠 장식과 놋 장식 등이 있다. 쌀 뒤주는 보통 쌀 1~2가마들이의 크기고, 잡곡 뒤주는 3~4말 들이로 쌀 뒤주보다 작다. 전라북도 김제시 월촌면 장화리에 보존돼 있는 조선 후기에 회화나무로 만든 약 70가마들이 대형 뒤주는 옛날 한국 부호들의 모습을 알려 주는 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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