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용수의 에세이


 

 


쌀밥과 보리밥이 아니라 밥이 홀대를 받는 시대다. 고기를 먹고 나서도 밥은 먹을 사람만 손을 들란다. 밥이 필수가 아닌 선택이 되면서 쌀은 자꾸만 남아돌고 세상 인심도 많이 변했다.
추곡수매제가 쌀 직불제로 위로를 해도, 쌀값이 모래 값보다 못하다고 하면서 행복의 잣대도 행복의 치수도 많이 달라졌다.
써레질을 하고 모내기를 하고 들판이 황금색으로 변하면 바라만 보아도 배가 부르던 시절, 허수아비는 참새를 쫓는다고 뙤약볕에도 두 팔을 벌린다. 벼 타작을 한다고 탈곡기가 헐떡거리고, 저 아래 물레방앗간에선 벼의 껍질을 벗긴다고 물레방아가 신명이 나면, 철수와 영이의 사랑도 물레방앗간에서 물레방아가 되어 뒹굴었다지.
밥이 귀하던 그 시절, 손님이라도 올라치면 제일 먼저 걱정이 된다는 밥. 밥숟가락 하나 줄이겠다고 새끼들 남의 집 식모살이로 보내고 꼴머슴으로 보냈었지. 누구네 제사가 있는 밤이면 그 놈의 제사 밥 때문에 잠들지 못하고, 묘사 떡 한몫 챙기겠다고 잠이 든 아이를 깨워 산을 오르던 것도 추억이다.
농림부에서는 보리혼식과 분식장려운동을 펼치고, 한국부인회에서는 혼식분식으로 식생활을 개선하자는 구호를 외쳤었지. 정부에서는 혼식분식에 약한 몸 없다고 혼분식의 노래를 만들고, 학교에서는 시퍼런 칼날보다 더 무서운 도시락검사가 때가 되면 펼쳐졌었지. 질기다는 검정고무신이 사라지고, 한강의 다리가 30여 개로 늘어난 지금, 남아도는 저 쌀을 어이할꼬.                     
늘려 먹는다고 시래기를 넣으면 시래기 밥이 되고, 무를 넣으면 무밥이 되고, 쑥을 넣으면 쑥밥이 되고 콩나물을 넣으면 콩나물밥이 되어 대하드라마로 흐르던 밥의 애환이여. 벼의 품종이 진화를 하고 차별화된 쌀이 명품으로 도약을 하지만, 몸값이 오르기는커녕 폭락이라고 그 착한 농민들이 분해하고 원통해하며 시위를 한다.
접시용의 끈기가 없고 부슬부슬한 안남미라는 ‘인디카’도, 기름지고 찰기가 많은 밥그릇용의 ‘자포니카’도, 조상님의 제사상이나 되어야 고봉이 된다. 명절이나 되어야 찹쌀이 비로소 떡이 되고, 멥쌀이 제대로 밥이 된다.
논밭을 떠나면 죽는 줄 알던 고향은, 가장 못난 자식이 선산을 지키고, 출세를 한 녀석들은 자랑을 하고 싶을 때에야 고향을 찾고, 어떤 사람들은 선거 출마가 있을 때에야 조상의 묘를 찾아 하늘의 뜻이라고 우겨댄다.
주어진 삶이 제각각이요, 행복의 종류도 제각각인 민주공화국에서 누구를 탓한다는 건 크나큰 오류요 편견인지도 모른다.
주문을 하든지, 배달을 하든지, 부르면 옥탑까지 달려오는 이 시대의 밥이 아닌가. 이제 그릇에 담는 밥의 시대가 끝나가는지도 모르겠다. 혼자 먹는 혼밥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24시 편의점에 있는 수십 종의 컵밥을 보라. 햄버그덮밥, 오삼불고기덮밥, 부대찌개 컵밥, 햇반 컵밥, 춘천닭갈비덮밥, 돈가스덮밥, 오뚜기덮밥, 황태국밥….
정월대보름은 약밥이니, 찰밥이니, 오곡밥이니 하며 세집 이상을 얻어 먹으면 운수나 건강에 좋다고 하였지. 조리밥이니 세성받이 밥이라고도 하는 이 풍속도는 이미 사라져 갔다.
노래가 되고 키스가 되고, 아니  목구멍을 통하는 모든 것은 너와 내가 있을 때라야 설레고 신명이 난다. 혼자 마시는 혼술도, 혼자 잠자는 혼방도 좋지만, 혼자는 외롭지 않을까. 촉촉한 손을 잡아주고, 따뜻한 눈길을 보내며 마주하는 밥상도, 하늘이 허락한 시간은 그리 길지 않다.
아기 젖이 모지라면 쌀뜨물로 대신하던 쌀의 변천사가 강물처럼 출렁거린다. 삶의 뿌리가 가정이요, 가정의 행복은 밥이다. 신달자의 ‘가정백반’이다.

집 앞 상가에서 가정백반을 먹는다./ 가정백반은 내 집에 없고/ 상가건물 지하 남원집에 있는데/ 집 밥 같은 가정백반은 집 아닌 남원집에 있는데/ 집에는 가정이 없나/ 밥이 없으니 가정이 없나?/ 혼자 먹는 가정백반/ 남원집 옆 24시간 편의점에서도 파나?/ 꾸역꾸역 가정백반을 넘기고/ 기웃기웃 가정으로 돌아가는데/ 대모산이 엄마처럼 콧물을 훌쩍이는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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