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용수의 에세이


 

 

사바세계에는 아집과 독선 갈등과 투쟁, 정의와 평등 자유와 평화가 늘 대립하지만 역사의 공통분모는 순간들이 모여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위기가 있고 어렵다 해도 강물처럼 앞으로 나아가는 민주주의. 따뜻하고 양심적인 보수, 합리적이고 인간적인 진보, 사랑은 상업이나 자본의 논리가 아니라고 오늘도 순간순간 싸움을 하면서 동행을 한다.
흑백의 돌이 피 터지도록 싸워도 바둑판 위의 동행이요, 한나라와 초나라가 물러서지 않고 피비린내를 풍겨도 장기판 위의 동행이다.
사면초가이거나 건곤일척의 싸움도 결국 너와 내가 있어야 된다.
천길 절벽에 있거나 만길 낭떠러지에 있어도 너와 내가 없으면 사랑도, 진검승부도 있을 수 있을까. 순간으로 태어난 너와 나는 참으로 위대한지도 모르겠다.
오늘밤이 아무리 어두워도 순간순간들이 모여 어둠을 물리치고 내일의 태양이 떠오르며 새해의 태양이 떠오른다.
거창한 회개나 참회가 없어도 오늘 이 순간, 영혼이 머무는 마음 자리에 은밀한 사랑 하나 심어 놓으면 풍성한 가을이 틀림없이 오리라.
저 유명한 법성게도 한없는 긴 시간이 한 생각 찰나라고, 찰나의 한 생각이 무량한 긴 겁이라고, 무량원겁즉일념 일념즉시무량겁(無量遠劫卽一念 一念卽是無量劫)이라 했다.
천년에 한번 오는 좋은 기회도 한때라고 천세일시(千歲一時)라 하질 않던가. 벌써 알몸의 목련이 꽃눈을 준비하고, 꽃을 내주어야 결실을 맺는다는 맨살의 매화나무가 봄을 준비한다. 순간순간이 골든타임이다. 명예도, 돈도, 생명마저도 잃는 것은 한 순간이다. 얻는 것도 한 순간이다.
임제의 죽비처럼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이 생각난다. 어느 곳에 있어도 당당하게 주인이라고 외치는 겨울 소나무가 추울수록 왜 저렇게도 싱싱할까. 어느 시인은 하늘 아래 내가 받은 가장 커다란 선물은 오늘이요, 오늘 받은 선물 가운데서도 가장 아름다운 선물은 당신이라고 했었지. 오늘 이 순간에도 삶의 바퀴는 구르니 매 순간을 내가 주인이 되어 사랑하라는 뜻이 아니겠는가.
우리 인생의 웅장한 파연곡(罷宴曲)을 위해 따뜻한 순간들이 모여 모두가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겨울이 아무리 추워도 봄은 온다. 밤이 지나면 새벽이 오고 아침이 오듯 수많은 처음은 수많은 순간이다. 순간은 장전된 실탄처럼 절제와 내공의 미학이다. 그대가 어느 시간대에 있든, 당신이 어느 장소에 있든 이 겨울이 모닥불처럼 따뜻했으면 정말 좋겠다. 수색이 있고, 압수가 있고, 소환이 있고, 체포가 있고, 출국금지가 있어도 정유년 새해의 신년사는 너도 나도 따뜻한 희망이 아니었던가.
소한이 지나고 대한이 지나고, 아무리 시끄러워도 병아리 떼 쫑쫑거리는 대한민국의 봄은 오고 있다.
정현종의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인 것을’이란 시다.

나는 가끔 후회한다./ 그때 그 일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그때 그 사람이 그때 그 물건이/ 노다지였을지도 모르는데
더 열심히 파고들고/ 더 열심히 말을 걸고/ 더 열심히 귀 기울이고/ 더 열심히 사랑할걸.
반벙어리처럼 귀머거리처럼 보내지는 않았는가./ 우두커니처럼 더 열심히 그 순간을 사랑할 것을
모든 순간이 다아 꽃봉오리인 것을/ 내 열심에 따라 피어날 꽃봉오리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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