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수의 문화답사


 

 

 

국립 청주박물관

◈조선문화
조선문화실은 충북의 역사 인물을 중심으로 소개된다. 충청북도는 예로부터 충절로 대표되는 유학자를 많이 배출했다. 기호유학을 대표하는 송시열(1607~1689)과 그를 중심으로 유학의 한 축을 형성하면서 조선을 이끌어갔던 문인들의 대쪽 같은 의리명분론은 구한말 의병운동과 독립운동의 연원이 됐다. 기묘명현 김정(1486~1521). 양명학에 조예가 깊은 최석정(1646~1715)과 같은 큰 학자가 이곳에서 활동했다.

◈송시열 초상
우암 송시열(1607~1689)은 기호유학을 대표하는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성리학자다. 충북 옥천에서 태어났으며 타고난 자질이 엄숙하고 대범하면서도 강직해 어려서부터 성학에 뜻을 뒀고, 자라서는 김장생(1548~1631)에게 배웠다. 의리사상이 투철해 북벌사상의 중심 인물로 추앙됐고 의리와 도덕을 강조해 청나라를 정벌하고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키고자 했다. 1689년 왕세자(경종) 책봉문제로 상소를 올렸다가 제주도로 유배됐고 국문을 받기 위해 상경하던 중 남인의 책동으로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이 영정은 사방모에 심의 차림을 한 반신상이다.

◈사라진 청주읍성의  역사를 밝히다
청주 서문동 성안유적은 청원군청 내에 있는 청주동헌으로부터 서쪽으로 약 50m 정도 떨어진 곳이다. 청주는 백제 때는 낭비성 또는 낭성으로 불리었으며 통일 후에는 서원소경으로 바뀌었다. 현재와 같이 청주라는 지명으로 불리어진 것은 고려 이후부터다.
청주가 오랜 역사의 도시임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청주읍성은 일제 강점기에 사라졌다. 청주 서문동 성안유적은 사라진 청주읍성과 고려시대 이래로 구한말까지 존재했던 역사를 증명한다는 점에서도 큰 의의를 지닌다.

◈석가여래좌상
이 돌부처는 불상을 비롯한 인왕상 신장상 등 많은 불교 조각품이 있었던 충북 청원군 흥복사지의 남쪽에 있는 암자에서 옮겨온 것이다. 불상의 오른손은 두려움을 없애주는 시무외인을, 왼손은 중생의 모든 소원을 들어준다는 여원인을 하고 있다.
부처의 얼굴은 살이 올라 통통하고 입술은 작은 편이며 곱슬머리 위에 높은 상투가 있다. 법의는 U자형으로 흘러내려 무릎까지 덮었다. 연꽃으로 장식된 받침은 2개가 한 판을 이루는데 한쪽 부분이 없어져 모두 복원했다.


용두사지 철당간(국보 제41호)

이곳 용두사지는 지금은 절도 없는 빈터에 달랑 철당간이 하늘을 찌르고 있다.
이곳은 서울이면 명동과 같은 곳으로 청춘의 물결이 출렁거리는 젊음의 거리로 바뀌어 있다.
천년이 넘는 시공 속에 어찌 옛날의 모습을 찾을 수 있으랴. 당간은 사찰 앞에 세워 사찰을 알리는 깃발을 달았던 것이다. 신라와 고려시대에 사찰의 건립과 함께 많은 수의 당간이 세워졌으나 현재는 대부분 당간을 받치고 있던 지주만이 남아 있다. 철당간이 서 있는 곳은 고려시대 청주의 대표적인 사찰이었던 용두사가 있던 자리다.
이 당간은 화강석으로 지주를 세우고 그 사이 둥근 철통 30개를 연결해 세운 것인데 현재는 20개만이 남아 있다. 이 중 밑에서 세 번째의 철통에 용두사철당기가 새겨져 있다.
명문이 새겨진 철당간으로는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유일한 것이다. 철당기에는 당간을 세우게 된 내력과 건립 연대, 그리고 건립에 관여한 사람들의 관직명이 적혀 있어 당시의 지방경영과 관련된 사실을 알 수 있다. 철당기의 끝에는 ‘준풍(峻豊) 3년’(962)에 주성했다고 해 고려 광종 때 사용했던 독자 연호를 실물로 보여주는 귀중한 사료다.

이번 여름 삼복의 날씨는 그야말로 제멋대로였다. 개였다, 흐렸다, 소낙비를 뿌렸다…. 그러나 이번 답사팀은 모두들 열심히 문화유산답사에 열을 올리고 있으니 더욱 덥고, 흐르는 땀은 더욱 빛을 발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다음을 기약하며 답사기를 마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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