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용수의 에세이


 

 

지금 전설적인 뙤약볕 아래 전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연꽃축제가 우리를 가만히 놔두질 않는다. 청아하고 고결하게, 아름답고 향기롭게, 청정무구의 화중군자 연꽃. 연꽃은 불교의 상징인양 조계사, 봉은사, 선원사, 봉원사, 법화사, 청운사에서 세상을 맑고 부드럽게 자비의 미소로 물들이고 있다. 함양상림공원 연꽃단지, 함안의 연꽃테마파크, 점령군처럼 점령해버린 주남저수지의 연꽃, 전주의 덕진공원 연꽃, 경주의 안압지 연꽃. 저 멀리 세미원이나 태안, 남궁지를 가지 않아도 국도를 타고 달리면 보이는 것이 연꽃이다.
왜 연꽃은 좋은 계절을 놔두고 삼복더위를 택했을까. 시련을 견디며 존재의 아방가르드를 예술로 승화시키는 때문일까. 늙은 노인의 오줌 줄기처럼 모든 것이 축축 늘어지고 휘어지는 이 더위에 잎도, 꽃도 무슨 일로 저렇게 당당한 것일까. 부처와 가섭의 연꽃 한 송이, 우리에게도 내적 세계를 발견하라는 기회를 부여코자 삼복을 택한 것은 아닐는지. 그 어떤 아름다운 향기도 바람을 거스르진 못한다고 했는데, 자비의 공덕을 쌓으면 바람과는 상관없이 이 세상 어디에고 향기가 도달한다는 지혜를 가르쳐주려고 염소 뿔이 녹는다는 대서에도 새벽부터 연꽃이 피었는가 보다.
무안의 회산 백련지다.
‘백련의 향기, 백년의 사랑’이라는 주제로 열리는 남도의 대표적인 여름축제. 20년의 역사만큼이나 10만평에 가득한 연꽃들이 가슴을 열고 사랑을 하고 있다. 향기를 품고 또 사랑을 나누고 있다.
‘세상을 진흙이라 보는 눈도 하얀 연꽃’이라는 오니쓰라의 하이쿠 한 줄이 생각난다. 일본의 전통 시로 짧은 하이쿠(5-7-5)와 와카(5-7-5-7-7)가 좋아 시집 하나 올 여름에 같이 다니고 있다.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연잎은 젖지 않는다.
‘마음에 간직하고 숨기는데도 어찌하여 눈물이 먼저 알아차릴까’, 이즈미 시키부의 와카를 연잎은 알고 있는 모양이다.
연신 부채를 젓는 어느 노부부에게 눈길이 간다.
마지막은 나와 함께 걸어가는 사람들이다.
지치고 힘든 세월 앞장세우고 연꽃 우산 길을 돌고, 연꽃 탐방로 안개분수 길을 돌아 당신이 있어 행복하다는 노부부가 회산 백련지의 연꽃에 내려앉은 나비다.
‘산다는 것은 나비처럼 내려앉는 것 어찌되었든,’ 소인의 하이쿠다.
연꽃의 면상희이(面相熹怡)를 닮아 인자하고, 연꽃의 성숙청정(成熟淸淨)을 닮아 맑은 사람이다.
조선 정조 때 문장가 유한준은 말한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고.
백련지의 연꽃을 바라본다. 진흙탕에서 자라지만 진흙에 물들지 않는다는 이제염오(離諸染汚)의 연꽃, 한 방울의 오물도 머무르지 않는다는 불여악구(不與惡俱)의 연꽃, 더러운 시궁창에서도 향기만이 연못에 가득하다는 계향충만(戒香充滿)의 연꽃, 어떤 곳에 있어도 푸르고 맑은 줄기와 잎을 유지한다는 본체청정(本體淸淨)의 연꽃.
그래서 주돈이는 ‘애련설’에서 꽃 중의 군자는 연꽃이라 했나 보다.
꽃과 잎은 하늘에, 뿌리는 땅 속에, 줄기는 물 속에 있는 연꽃.
향기는 멀어질수록 더욱 맑아지고 몸은 반듯하고 깨끗하게 서 있어서 멀리서 바라볼 수는 있어도 가벼이 희롱할 수는 없다는 연꽃.
어느 누가 바라보아도 눈부시지 않아 더욱 아름다운 건 연꽃의 예(禮) 때문이 아닐까. 공자도 공손하되 예가 없으면 고달프고, 신중하되 예가 없으면 두려우며, 용맹스럽되 예가 없으면 문란하고, 강직하되 예가 없으면 박절하다고 했다. 박상은 하첩(夏帖)에서 푸른 연잎 천만 자루 붉은 꽃이 터지니 하늘에서 보련화를 뿌린 줄로 알았다 했고, 허난설헌은 연꽃 깊은 곳에 목란 배를 매어두고 님 만나 물 저편에 연밥을 던지고는 행여 남이 봤을까봐 한참이나 부끄러워했다고 한다. 서정주는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 같이’에서 아주 섭섭지는 말고 좀 섭섭한 듯만 하게 하고, 아주 영 이별은 말고 어디 내생에서라도 다시 만나기로 하는 이별을 노래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노래한 저 연꽃을 닮을 수만 있다면 우리의 사랑도 얼마나 좋을까.
잎이며, 뿌리며, 꽃이며, 열매를 다 내어주고도 더 내어 줄 것이 없어 그저 웃기만 하는 연꽃은 선(禪)이다.
취하고 버리는 분별과, 집착을 여의는 것이 선이라 하질 않던가.
순결하고 청순한 연꽃이라도 호불호(好不好)는 저마다 전부 다르고, 선악(善惡)과 미추(美醜)의 기준도 저마다 전부 다르다.
서산대사는 말한다. 더 말하지 말라, 살아 있는 도(道)가 죽은 문자로 변할까 두렵다. 이제는 더 연꽃을 말하지 않으련다. 

 

저작권자 © 한국아파트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