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수의 문화답사


 

 

상당산성

상당산성은 삼국시대 백제의 상당현에서 유래된 이름인 듯하며 둘레가 4.2㎞, 면적 93만4,130㎡의 거대한 포곡식(包谷式) 석축산성이다. 상당산성의 정확한 축성 연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다만 삼국사기에 김유신의 셋째 아들 원정공이 서원술성을 쌓았다는 기록과 ‘상당산성고금사적기’에 김유신 장군의 아버지인 김서현 장군이 쌓았다는 기록, 또 ‘신증동국여지승람’ 청주목 고적조에 고상당성은 율봉역의 북(뒤)에 있고 석축으로 둘레가 7,773척(2,600m)인데 성 안에 큰 연못이 있다는 기록이 있다.
선조실록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충청병사로 왔던 원균이 수축한 사실이 있으며 효종실록, 숙종실록 비변사등록 등에 의하면 효종 2년(1651) 충청도병마절도사 영(領)이 해미에서 청주로 옮겨지고, 청주가 중요시돼 숙종 42년(1716)에 충청병사 유성추에 의해 개축이 시작돼 숙종 45년(1719)까지 대대적으로 성벽이 수축되고 이듬해 성내에 구룡사와 남악사의 2개 사찰과 암문이 마련됐는데 이러한 사실은 성문무사석(城門武砂石)의 기록에 의해서도 알 수 있다.
영조실록에 의하면 영조 4년(1728)에 이인좌의 난을 겪고 이듬해 대대적인 수축을 시작해 영조 7년(1731) 정청인 운주헌과 포루를 세웠고, 영조 8년(1732) 남문에 공작루가 세워지고 수성절목도 완성됐으며 이후 영조 19년(1743)까지 성 안의 여러 시설(관어사, 군기고, 동서창, 수구, 장대)이 모두 완성되고 마지막으로 동장대(보화정)가 완성됐다.
현재 상당산성에 동문(진동문), 서문(미호문), 남문(공남문)의 3개문과 동암문, 남암문의 2개 암문, 치성 3개소, 수구 3개소가 있는데 1977년부터 1978년까지 정비공사로 동,남문루와 동문이 재건됐고, 1992년 말에는 동장대도 재건됐다. 또한 현재의 저수지는 본래의 수문이 홍수로 없어진 후 1943년에 만든 것이다.

◈남문지
남문지는 남쪽 성벽 서쪽 끝에 위치하며 남서쪽 모서리에 설치된 성위에서 적을 감시하거나 공격하기 위해 지은 치성이 방향을 북쪽으로 회전하며 서쪽 성벽과 연결된다. 문 밖으로는 작은 계곡부가 있으며 이 계곡부를 중심으로 양쪽의 능선부로 이어지는 성벽에는 반원형 치성이 설치돼 있어 남쪽으로 접근하는 적들을 쉽게 공격할 수 있도록 했다. 문지의 규모는 너비 3.6m, 길이 10.6m이고 높이는 서쪽면을 기준으로 하면 약 5m, 동쪽면을 기준으로 하면 9m에 이른다. 문의 형식은 사다리를 이용해 폐쇄했으며 남문지 부근의 성벽도 두세 차례 개축했다. 문지 터에서는 온전한 형태의 바닥 확쇠 한 쌍과 문에 사용됐으리라 추측되는 못과 철제 광두정이 출토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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