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수의 문화답사

 

 

안채 옆으로는 장광도 그냥 있다. 그 옆에는 ‘모란이 피기까지는’ 한 구절을 새겨 놓은 시비가 있고 이곳이 ‘오 매 단풍 들것네’의 모티브가 된 곳이라는 설명도 붙어 있다. 

오 매 단풍 들것네/ 장광에 골붉은 감잎 날아와/ 누이는 놀란 듯이 치어다보며/ 오 -매 단풍 들것네/ 추석이 내일 모래 기둘리니/ 바람이 잦이어서 걱정이리/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오 -매 단풍 들것네  
-‘오 매 단풍 들것네’ 전문

초가을 아침, 누이가 장을 뜨려고 독을 여는 순간 그녀의 손에 골붉은 감잎이 하나 떨어진다. 누이는 놀란 눈으로 장광 뒤의 감나무를 쳐다본다. 감이 붉게 익어갈 터이지만 누이는 울긋불긋 단풍 들어가는 잎에 더 마음이 쏠렸으리라. 가을이 깊어지면 시집 갈 날도 머지않은 터, ‘오 -매 단풍 들것네’ 놀라는 누이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이것이 첫 연이다.
둘째 연은 누이를 바라보는 심정. 그는 건너편 사랑방 툇마루에서 감나무를 쳐다보는 누이를 보고 있다. 추석이 내일 모레, 혼인을 앞둔 누이의 마음을 왜 모르랴. 불과 8행의 짧은 시행 속에 세 번이나 반복된 ‘오 -매 단풍 들것네’에 얼마나 따뜻한 오누이의 정감이 내포돼 있는지를 생각하면서 바라보는 장광이 정겹다.
문간채 대문을 들어서면 시의 소재가 됐던 샘물과 장독대, 감나무가 둘러쳐져 있고 장독대 앞은 모란 밭으로 꾸며놓고, 뒤란은 둘러친 대나무 숲과 아름드리 동백나무 다섯 그루가 영랑의 시정을 그대로 보여준다. 안채의 서쪽 중마루방은 영랑이 어려서 거처하던 방이요, 집필할 때 주로 사용했다는 사랑채엔 그의 밀랍인형을 모셔두고 있다. 이 사랑방에는 묵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는데 마음이 넉넉하고 손이 큰 그는 늘 이들을 마다하지 않았다. 넓은 사랑방은 툇마루로 둘러져 있고 앞은 인조연못이다. 영랑은 이 툇마루에서 연못과 나무와 돌담을 바라보며 많은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다음의 시가 그것을 말해준다.

사개틀린 고풍의 툇마루에 없는 듯이 앉아/ 아직 떠오를 기척도 없는 달을 기들린다/ 아무런 생각 없이/ 아무런 뜻 없이// 이제 저 감나무 그림자가/ 사뿐 한 치씩 옮아오고/ 이 마루 위에 빛깔의 방석이/ 보시시 깔리우면// 나는 내 하나인 외론 벗/ 가널픈 내 그림자와/ 말없이 몸짓 없이 서로 맞대고 있으려니/ 이 밤 옮기는 발짓이나 들려오리라
-‘사개틀린 고풍의 툇마루에’ 전문
 
영랑은 이 집에서 태어났다. 영랑은 광복과 함께 우익운동을 주도해 대한청년단 단장을 지냈고 1948. 5. 10. 선거에 초대민의원에 출마해 낙선하고는 서울 신당동으로 온 가족이 이사를 했다. 이듬해 공보처 출판국장을 역임하고 우익 보수주의자로 활동하다가 1950. 9. 28. 수복 때 복부에 포탄 파편을 맞고는 9월 29일 사망했다. 난리 중에 이태원 남산 기슭에 가매장됐다가 1954년 망우리로 이장하고 다시 경기도 용인의 공원묘지로 옮겨졌다. 그의 시집으로는 ‘영랑시집’(1935)과 ‘영랑시선’(1948)이 남아 있다.
<끝>


【참고 문헌: 이야기한국사/ 조선왕조 오백년 야사/ 역사산책/ 한시이야기/ 나의 문화유산/ 시인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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