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수의 문화답사

 

김영랑의 시는 ‘시문학’에 주로 발표한 ‘내 마음 아실이’나 ‘돌담에 속삭이는 햇빛’과 같이 민요나 가사의 음보를 계승한 순수 서정시의 계열이 있고 ‘춘향’과 같은 사회나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민족혼과 그 신장을 위한 기개 등을 노래한 계열이 있다.
영랑은 1903년 1월 16일 전남 강진읍 남성읍 남성리 211번지 탑동마을에서 부친 김종호와 모친 김경무 사이에 2남 3녀 중 맏이로 태어났다. 본명은 윤식, 영랑은 그의 아호다.
부친은 500석지기의 대지주로 이 지방의 토호 유지였다. 향리에서 강진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이듬해인 13세에 두 살 연상의 김해 김씨와 결혼했으나 모친의 권고로 아내를 고향에 남겨둔 채 서울로 올라가 유학생활을 시작해야 했다.
처음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영어와 수학을 배우고 이듬해 휘문의숙에 입학해 문학에 대한 안목을 넓혀갔다. 당시 휘문에는 홍사용, 안석주, 박종화 등의 선배들이 있었고, 후배로는 정지용, 이태준 등이 있어 그들과 교유할 수 있었다.
결혼 1년 반 만인 휘문 1학년 시절 그의 아내가 사망했으니 영랑의 나이 고작 14세,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어려운 상처(喪妻)의 큰 시련을 겪게 된다. 아내의 부음을 듣고 종일 기차를 타고 내려왔으나 영산포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한밤이 돼 마차를 얻어 타고 밤새 강진까지 달려왔다고 한다. 사별한 아내를 추모해 읊은 작품으로 ‘쓸쓸한 뫼 앞에’와 ‘묘비명’이 전한다.

쓸쓸한 뫼 앞에 후젓이 앉으면/ 마음은 갈앉은 앙금같이/ 무덤의 잔디에 얼굴을 부비면/ 넋이는 향 맑은 구슬 손같이/ 산골로 가노라 산골로 가노라/ 무덤이 그리워 산골로 가노라
-‘쓸쓸한 뫼 앞에’(1918)

3·1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됨에 따라 고향으로 내려와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일경에 체포돼 대구 형무소에서 6개월간의 옥고를 치르고, 일본에 건너가 청산학원에 입학해 독립지사 박열과 같은 방에서 하숙을 했다. 동향의 시인 박용철과의 교분도 그 시기였다.
1921년 19세에 잠시 귀국해 성악을 공부하려 했으나 부모의 반대로 포기하고, 다시 도일해 청산학원에서 영문학을 공부하던 중 관동대지진으로 귀국했다. 고향으로 돌아온 영랑은 두 살 아래의 개성 호수돈 출신인 김귀련과 재혼해 집안에 모란을 가꾸며 지냈다.
강진읍 북쪽으로 둘러싸고 있는 나지막한 동산인 북산, 그 산자락 끝 양지바른 동네가 남성리 탑동으로 바로 영랑의 생가가 있는 곳이다. 읍내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터에 본채와 사랑채가 널찍이 자리 잡고 있다. 이 집은 지방문화재 제89호(현 중요민속자료 제252호)로 지정해 사랑채를 초가로 복원해놨다.

마당 앞/ 맑은 새암을 들여다본다// 저 깊은 땅 밑에/ 사로잡힌 넋 있어/ 언제나 먼 하늘만/ 내어다보고 계심 같아// 별이 총총한/ 맑은 새암을 들여다본다 저 깊은 땅 속에/ 편히 누운 넋 있어/ 이 밤 그 눈 반짝이고/ 그의 겉몸 부르심 같아// 마당 앞/ 맑은 새암은 내 영혼의 얼굴  
-‘마당 앞 맑은 새암’ 전문

맑은 샘을 들여다보며 저 깊은 땅 밑에 사로잡힌 넋 있어 언제나 먼 하늘만 내어다보고 계시는 것 같고, 저 깊은 땅 속에 편히 누운 넋이 있어 이 밤 그 눈을 반짝이면서 그의 겉몸을 부르는 것 같다고 상상한다는 것은 그의 시혼이 얼마나 티 없이 맑은가를 말해주는 대목일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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