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기용 칼럼

 

 

류 기 용 명예회장

고속도로를 벗어나 한적한 시골길로 접어들면 초록빛 모내기 모습과 황금색 물결이 넘실거리는 보리밭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일대 장관을 만나게 된다.
파릇파릇한 모판은 가을의 꿈을, 황금빛 보리밭은 인고(忍苦)의 세월에 대한 자연의 축복을 의미한다.
저 보리밭에는 가난하고 힘들었던 그러나 희망의 끈만은 결코 놓지 않았던 민초들의 삶이 오롯이 배어 있다. 논두렁 밭두렁 사이를 누비며 뛰놀던 사내 아이들 너머 산등성이 양지바른 언덕에는 나물 캐는 여자애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아지랑이 사이로 아른거리는 누이들의 자태는 왜 그리도 곱고 가슴을 설레게 하던지.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옛 기억 속에서 아직 색이 바래지 않은 얘깃거리는 또 얼마나 많았던가. 하루 종일 산과 들을 헤매고 다니다가 배가 고프면 까마중, 칡뿌리 등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고 땅거미가 질 무렵이면 틈틈이 서리를 엿보기도 했다. 또 보리가 아이들 키만큼 자랄 쯤이면 처녀 총각들이 보리밭을 들락거리며 속된 말로 ‘얼레리 꼴레리’를 키우기 바빴고 그해 가을에는 마을잔치 같은 혼사로 온 동네가 시끌벅적했다.
하지만 빛이 강하면 그림자도 짙은 법. 보리밭에 얽힌 사연이 어찌 정겨운 추억과 낭만뿐이랴.
보릿고개- 갈무리했던 양식이 바닥나 얼굴이 누렇게 뜨면서 시작되는 보리 수확에 대한 기다림의 시간은 어지간히 길고도 고달팠다.
그런데 요즘은 농촌의 풍경도 많이 달라졌다. 보리밭도, 뛰노는 개구쟁이도, 나물 캐는 누이도 보기 어렵고 그 모질었던 가난 속에서도 서로를 보듬을 줄 알았던 살뜰한 정마저도 떠나고 없다. 이제 보리는 쌀에 밀리고 밀에 치이면서 농촌뿐 아니라 밥상에서조차 만나기 쉽지 않은 식량계의 비주류, 아웃사이더로 전락했다.
아련한 추억 속에서 맴돌던 눈길이 다시 보리밭에서 멈춰 선다. 혹독한 겨울을 이겨내고 마침내 황금빛으로 완성된 보리밭 위로 주택관리사 등의 모습이 겹쳐진다. 그들 역시 지금 고난과 시련 속에서 혹독한 시절을 보내고 있다. 말이 좋아 법정단체, 국가공인 전문관리 자격이지 여타 전문직업군에 비하면 모든 면에서 비주류나 아웃사이더급 흙수저에 다름 아니다. 게다가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티가 잘 안 나다 보니 알아주는 이도 없는 터에 천박스럽기 짝이 없는 무지렁이들은 인격살인까지 서슴지 않고 있으니 마지못해 아니 죽지 못해 사는 관리사무소장들도 없지 않을 것이다.
선배랍시고 ‘무조건 시련을 견디며 이겨내라’고 충고할 염치도 없다. 좀 더 나은 환경을 만들지 못한 것은 분명 앞선 자들의 책임도 크기 때문이다. 다만 한 겨울을 이겨내고 황금 왕관을 거머쥔 보리에게서 강한 의지와 인내를 배우라는 말은 꼭 하고 싶다.
이에 한흑구 시인의 수필 ‘보리’를 다시 꺼내어 본다.
“보리. 너는 차가운 땅 속에서 온 겨울을 자라왔다. 이미 한 해도 저물어 논과 밭에는 벼도 아무런 곡식도 남김없이 다 거두어들인 뒤에, 해도 짧은 가을날, 농부는 밭을 갈고 논을 잘 손질하여서, 너를 차디찬 땅 속에 깊이 묻어 놓았다. /…/ 칼날같이 매서운 바람이 너의 등을 밀고, 얼음같이 차디찬 눈이 너의 온몸을 덮어 억눌러도 너는 너의 푸른 생명을 잃지 않았었다. /…/ 춥고 어두운 겨울이 오랜 것은 아니었다. 어느덧 남향 언덕 위에 누렇던 잔디가 푸른 속잎을 날리고, 들판마다 민들레가 웃음을 웃을 때면 너, 보리는 논과 밭과 산등성이에까지 이미 푸른 바다의 물결로써 온 누리를 덮는다. /…/ 온 겨울의 어둠과 추위를 다 이겨내고, 봄의 아지랑이와 따뜻한 햇볕과 무르익은 그윽한 향기를 온 몸에 지니면서 너, 보리는 이제 모든 고초와 사명을 다 마친 듯이 고요히 머리를 숙이고, 머리를 숙이고 성자인 양 기도를 드린다. 이마 위에는 땀방울을 흘리면서 농부는 기쁜 얼굴로 너를 한아름 덥석 안아서 낫으로 스르릉 스르릉 너를 거둔다. /…/ 보리, 너는 항상 순박하고 억세고 참을성 많은 농부들과 함께 이 땅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셰익스피어가 그랬던가. ‘아플 때 우는 것은 삼류이고 아플 때 참는 것은 이류이며 아픔을 즐기는 것이 일류 인생’이라고.
그렇다. 아름다운 종소리를 더 멀리 퍼뜨리려면 종(鐘)이 더 아파야 한다. 그리고 아픈 만큼 더욱더 성숙해져야 함은 물론이다. 지금 주택관리사 등이 이토록 아픈 건 좀 더 강하고 아름다워지기 위한 일종의 성장통이라고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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