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수의 문화답사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일대는 예전에 마현마을로 불리던 곳으로 다산 정약용 선생이 태어나 유년시절을 보냈다.
다산은 강진에서의 18년 유배생활에서 벗어난 뒤 여생을 이곳에서 보냈다. 주자학과 천주학 사이에서 그리고 권력의 위협과 견제 아래에서 자신만의 철학을 정립해 실학의 체계를 완성한 다산 유적지는 다산 선생의 묘소를 중심으로 기념관, 복원생가, 사당 등으로 이뤄져 있으며 그는 이곳에서 1836년 7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여유당
18년의 긴 유배생활에서 돌아온 다산은 노자의 말에 여(與)여! ‘겨울의 냇물을 건너는 듯하고’ 유(猶)여! ‘사방을 두려워하는 듯 하거라’에 집당(堂) 자를 붙여 생가에 ‘여유당’이란 현판을 걸었다.
유배에서 풀려났다고는 하나 자신을 둘러싼 세상의 기운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하고 사방을 두려워하고 조심 조심 살아가고자 하는 그의 숨은 뜻이 느껴진다.
다산 생가 ‘여유당’은 홍수로 인해 유실되고 1986년 복원된 생가는 ‘ㅁ’자 형태의 팔작지붕의 민도리 집으로 안채와 사랑채를 구분했으며 사랑채에는 손님 접대실, 손님 침전, 하인방 등으로 구성하고 안채는 주인과 아내의 침전 사이에 마루형식으로 연결돼 있다.


#거중기
1792년(정조16) 다산 정약용(丁若鏞)이 서양의 기술과 도르래의 원리를 이용해 창의적으로 만든 기구로 높이 4.4m 너비 1.7m다. ‘기기도설’을 연구한 다산 정약용이 골차로 거중기를 만들어 수원성을 쌓는 사업을 지휘하면서 직접 만든 것으로 이 기계를 써서 건설경비를 4만냥이나 절약했고, 거중기를 이용해 노동자 두 사람이 약 10톤 또는 그 이상의 무거운 자재를 높은 곳으로 운반할 수 있었다.
원리는 비교적 간단해 위에 네 개의 도르래를 연결하고 아래 도르래 밑으로 물건을 달아 매고 위 도르래의 양쪽을 잡아 당길 수 있는 끈을 연결해 이 끈을 물레에 감아 동시에 물레를 돌림에 따라 연결된 끈을 통해 물건이 위로 들어 올려지도록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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