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의 여유

 

양종균

 

☞ 지난 호에 이어

“누가 널 좋아한데, 어림도 없어”
그의 진지한 태도에 조금은 당혹하며 빈정대듯 말했다. 그러다가 어색한 분위기를 바꾸고자 농담 삼아 한마디 던졌다.
“몰라, 저 꼭지에 있는 진달래를 꺾어 준다면 생각해볼 수도 있지”
절벽 끝머리에 소담스레 피어 있는 진달래를 가리키며 생글그렸다.
“정말이지? 그럼 내가 꺾어주지!”
그리고는 곧바로 절벽 쪽으로 가는 것이 아닌가? 10여 미터는 족히 되는 높이에 상당히 가파른 곳이다.
“정말 자신 있어? 위험한데”
“걱정 마, 수로부인, 내 기꺼이 바치리라!”
그의 장담에 천길 절벽 위의 꽃을 따다 바치는 견우노옹의 獻花歌를 연상하며 그를 지켜보았다.
그는 바위에 바짝 붙어 한 걸음 한 걸음 올라가더니 드디어 한묶음의 진달래를 꺾고는 뒤로 돌아보며 꽃을 든 팔을 흔들었다.
“명희야! 이만하면 됐지?”
“그래 됐어, 그만 내려와”
그가 새삼 대견스러웠다. 그의 사랑을 받아주어도 될 것 같다. 아니 자신이 먼저 그를 사랑해야만 될 것 같았다. 그가 내려오면 그의 품에 뛰어들고 싶다. 그런데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그는 어-어 하는 비명과 함께 아래로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최 여사는 또다시 가슴이 미어지며 온몸이 진저리쳐졌다.
그것은 30년 동안 떨쳐 버리지 못했던 굴레였다. 스님의 말씀처럼 업장이었다. 특히 4월이면 피범벅된 그와 함께하는 악몽이었다.
이를 벗어 버리고자 오로지 공부에만 열중하고 급기야는 미국으로 유학을 했다. 그리고는 그곳에서 아예 눌러앉고 말았다. 하지만 그것은 고향을 등지기 위한 도피 행각이었던 것이다.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잠시 들르곤 멀리 있다는 핑계로 산소조차 친지들에게 맡겨버린 상태였다.
한 사람을 죽였다는 죄의식 때문에 결혼은 생각하지 않고 있다가 남편의 끈질긴 구애를 받아 결혼하여 그런대로 행복한 삶을 영위하였지만 4월이 되면 악몽은 이어지는 것이다.
꿈 속의 그는 언제나 외로움을 호소했다.
남편이나 자식들이 무슨 사연인가를 물어도 차마 얘기할 수 없었다. 가족들에게도 숨겨야만 하는 또 다른 고통이 이어졌다.
媤家의 행사 때문에 일시 귀국하여 얼마간 휴식하고자 남편과 아이들을 먼저 보내고 혼자 남아 친구들을 찾아다니던 중 친구 소개로 한 스님을 만났다.
“보살님. 그동안 쌓아두셨던 업을 푸셔야겠습니다”
스님의 느닷없는 그 한 마디에 그동안 숨겼던 얘기를 하게 되었고 스님의 권유대로 서둘러 그를 위한 遷度齋도 올렸다.
그 덕분인가?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마지막으로 그의 무덤에서 용서를 빌고자 한 것이다. 그의 무덤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부모님들이 딱하게 여겨 선산의 한 곳에 자리를 내어주었던 곳이다. 누군가 돌보고 있음인지 생각보다는 초라하지 않았다.
최 여사는 진달래 한묶음을 헌상한 후 경건히 절을 하고는 꿇어앉았다.
“명수씨 이제야 용서를 빌러 왔답니다. 저를 용서하시고 이제 그만 구천을 떠돌지 마시고 極樂往生하세요. 명수씨가 저를 사랑했듯이 저 역시 명수씨를 사랑했는데…. 이제 怨恨을 푸시고서…”
최 여사는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훔치지도 않은 채 묘를 쓰다듬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인기척에 놀라 돌아보니 한 여인이 서있었다.
“댁이 누구신데 우리 오빠 산소에…”
그렇다. 그 사람의 하나 밖에 없는 동생 명희였다. 자신의 이름과 같아 큰 명희 작은 명희 하며 동네 사람들이 말하던 그 동생이다. 30년의 세월이 지났건만 옛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녀 역시 기억이 나는가 보다. 그녀는 반가이 말했다.
“어- 명희 언니-”
“ 명희야.!”
“언니가 여기에 웬일로? 행여 첫사랑을 못 잊어 오신 건가?”
그녀는 짓궂게 웃으며 말했다.
“음- 저-”
“다 알아요 오빠와 언니가 서로 좋아했다는 거, 그런데 좀 서운하긴 했어요. 오빠가 죽었는데도 언니가 한 번도 오지 않아서, 허긴 올 처지도 아니었겠지만, 그래도 오빠는 언니 주려고 진달래를 꺾으려고 했던 모양인데”
머뭇거리는 최 여사의 말을 가로막으며 그녀는 재미있다는 듯이 말했다.
“사실 명희야, 오빠에게 용서를 빌려왔어! 명희야 용서…”
말을 끝맺지 못한 채 그녀는 울먹였다.
“무슨 말이에요? 용서라니!, 언니가 무슨~”
그 사람이 비명과 함께 절벽 아래로 곤두박질하는 순간 그녀는 그 자리에서 도망쳐 나왔다. 피범벅이 된 그의 모습이 무섭기도 했지만 어쩌면 그와 함께 있었다는 자체가 더 겁이 났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그곳을 벗어나서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서둘러 집을 떠났다.
“그때 사람들에게 알렸더라면 살았을 텐데…”
최 여사는 그녀 품에 쓰러지며 어깨를 들먹였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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