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수의 문화답사

 


 

 

◈옥류천 일원-다양한 각도에서 경치를 감상할 수 있는 곳
옥류천은 후원 북쪽 가장 깊은 골짜기에 흐른다. 1636년(인조 14)에 거대한 바위인 소요암을 깎아 내고 그 위에 홈을 파서 휘도는 물길을 끌어들여 작은 폭포를 만들었으며 곡수(曲水)형의 수로를 따라 흐르는 물 위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짓는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을 벌이기도 했다. 소요정, 태극정, 농산정, 취한정, 청의정 등 작은 규모의 정자를 곳곳에 세워 어느 한 곳에 집중되지 않고 여러 방향으로 분산되는 정원을 이뤘다. 작은 논을 끼고 있는 청의정은 볏짚으로 지붕을 덮은 초가다. ‘동궐도’에는 16채의 초가가 보이는데 아쉽게도 지금은 청의정만 궁궐 유일한 초가로 남아 있다.
 

◈유상곡수연
353년 중국 동진 소흥(소흥, 현 사오싱) 지방의 난정(蘭亭)에 당대 명필 왕희지(307~395)를 비롯한 명사 4명이 모였다. 난정 밑에 구비치는 물길을 만들어 술잔을 띄워 보내면 자기 앞에 온 술잔을 받아들고 시를 지어 발표했다. 다음 잔이 올 때까지 발표하지 못하면 벌주로 술 석 잔을 마셔야 했다. 여기서 나온 시를 모은 것이 ‘난정집서蘭亭集序’다. 이 놀이를 ‘유상곡수연’이라 해 그때부터 상류층의 유희로 크게 유행했다고 한다.
 

◈화성 행차와 농산정
정조는 가끔 후원에서 정취를 즐겼는데 특히 농산정을 좋아해 재숙(齋宿)을 하기도 했으며 화성행차 준비를 이곳에서 하기도 했다. 화성은 정조가 은퇴 후 어머니와 함께 살 행궁으로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에서 가까운 곳에 건설한 도시였다. 혜경궁홍씨의 회갑을 기념해 화성으로 행차 준비를 할 때 창덕궁 후원에서 혜경궁이 타고 갈 가마를 메는 연습 등을 한 후 농산정에서 신하들에게 음식을 대접했다고 한다.
 

◈신 선원전 일원-역대 임금의 어진을 모셨던 곳
이곳에는 원래 임진왜란 때 군대를 보내 준 명나라 신종을 제사 지내기 위해 설치한 대보단이 있었다. 일제강점기인 1921년에 대보단을 철거하고 새로운 선원전을 지어 구 선원전에 모셨던 어진들을 옮겨 왔다. 이처럼 후원 깊숙한 곳으로 선원전을 이전한 까닭은 중국의 영향력을 제거하고 조선 왕실의 상징성을 약화시키려는 의도로 보인다. 태조부터 순종까지 12명의 어진이 있었는데 한국전쟁 때 부산으로 피난했다가 실수로 불타 없어졌다.
 

◈신 선원전 안의 정자들
현재 신 선원전 안에는 두 개의 정자가 있다. 이들은 원래 후원 바깥 영역에 속했다. 후원 북서쪽 경계에 훈련원 군영이던 북영이 있었는데 1759년 훈련대장이 군영의 누각으로 몽담정을 지었다. 군사용 정자답게 규모가 크고 당당하다. 북쪽 언덕에 있는 괘궁정(掛弓亭)은 군영 안의 활터를 내려다보던 정자다. ‘괘궁이 활을 걸다’라는 뜻이나 그 이름처럼 활쏘기를 감상하던 정자임을 알 수 있다.
 

◈활쏘기를 못 해 북영에 감금당했던 정약용
정조는 규장각의 여러 신하들에게도 활쏘기를 시켜 문무를 겸비한 재목으로 키우려 했다. 정약용이 규장각에 근무하던 1791년(정조 15) 북영에서 활쏘기를 하는데 영 신통치 않았다. 평상시에는 활을 제대로 못 쏘면 벌주를 받았지만 정조는 이것은 벌이 아니라 상이라며 북영에 정약용을 잡아 놓고 5발을 쏠 때마다 1발씩 맞혀야 풀어주겠다고 했다. 정약용은 활을 망가뜨리고 손이 부르트고 말 타는 법이 서툴러 보는 사람들이 크게 웃을 정도였으나 며칠 지나자 능숙해지고 열흘이 지나서야 풀려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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