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여행

 

해가 지는 자작나무숲은 백야처럼 저만치 어둠이 멈춰있다. 살아왔던 시간들의 찌꺼기를 걸러내며 하얗게 껍질을 벗고 있는 나무. 그 숲의 눈밭에 풀썩 앉아 나도 껍질을 벗으며 무언가 고백해야 할 것 같다.

 

바보들의 행진


네팔 포카라를 출발, 안나푸르나 트레킹 여정에 오른 지인이 촘롱의 롯지에서 찍은 사진을 카톡으로 보내왔다. 이름 모를 야생화들과 롯지의 화단에서 자라고 있는 한련. 바위틈에서 피고 있는 앵초, 뾰죽한 설산들을 머리에 이고 봄을 지나는 고지대의 풍경들. 이십 여일의 고행 같은 트레킹을 끝내고 비 오는 룸비니 대성석가사에서 “무작정 걷는 바보들의 행진”에 동참한 것 같다며 “세계의 지붕까지 가고자 했지만 나는 더 작아졌다”는 문자를 보내고 카트만두로 떠났다.

다음날 무언가의 목마름에 자작나무숲으로 갔다. 엉거주춤 따라온 세월은 펑펑 눈 내리는 길모퉁이에서 발자국을 지운다. 가끔은 수꿩이 뒤뚱대며 숲으로 숨고 바람은 들꽃들을 매만지다 흰 서리에 떨어진 나뭇잎 속으로 숨어버린 숲길. 눈 내린 자작나무숲은 눈이 부셨다. “그만 나는 영문 모를 드넓은 자작나무 분지로 접어들었다. 누군가가 가라고 내 등을 떠밀었는지 나는 뒤돌아봤다. 아무도 없다. 다만 눈밭에 익숙한 먼 산에 대해서 아무런 상관없이 자작나무 숲의 벗은 몸들이 이 세상을 정직하게 한다”는 고은 시인의 시구는 또 다른 바보들의 행진 같은 삭막한 도시를 잠시 떠난 내게 자작나무숲에서 가만히 속삭인다.
세월이 흘렀을까. 몇 년 전에 비해 젊은 남녀들의 모습들이 눈에 많이 띈다. 더 밝고 젊어진 숲. 굵고 키가 커진 나무는 스스로 가지를 자르며 검은 사다리를 만들어 하얗게 하늘로 올라가고 있다. 문득 동 티벳 가던 길의 설봉들을 떠올린다. 달빛이 하얗게 산을 비추던 곳. 시간과 소유가 무의미한 사람들이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고 있는 제임스 힐튼의 소설 ‘잃어버린 지평선’에 등장하는 신비롭고 아름다운  ‘샹그릴라’라는 이상향의 마을을.
눈이 오다 쌓인 숲은 새 한 마리 호르르 난다. 눈밭에 털썩 앉아 마시는 시원한 한 모금의 포도주. 붉게 눈 속으로 번지듯 스며들다 화르르 불꽃처럼 일어나는 기억들. 자작나무 숲에는 그리움이 있다. 무언가 그리워한다는 것은 삶을 사랑한다는 것. 간혹 기억의 아린을 한 겹 한 겹 벗기다 보면 저편 서랍 한구석에 차곡차곡 정돈 된 빛바랜 편지 봉투의 의미쯤으로 우리는 광활한 삶의 어느 골목을 걷고 있는 것일까. 그 숲엔 마법이 있다. 나무 한 그루마다 갖고 있는 신성한 기운들. 무엇인가 내 발길을 잡아둬 어둠이 올 때까지 서성이며 숲에 머물렀다.
동 티벳 설봉을 비추던 하얀 달에 대한 신비한 기억 같이 자작나무 숲은 겨울이 지나도 그 숲을 다시 그리워하게 할 것이다. 자작나무는 4월에 꽃을 피우고 연초록 잎들은 5월의 바람결에 속삭인다. 여름의 맑은 바람에 자작이며 가을의 노란 잎들은 하얀 수피와 어우러져 사계절 다른 세상을 만들어 낸다. 사진 속에서 보았던 키르키스탄의 거대한 호수가 순백의 나무들과 어우러진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 생가로 가는 자작나무 숲길을 이곳에서 느껴 보자. 안주하던 도시를 벗어나 코끝에 단련된 먼지와 향수냄새도 잠시 뒤로 한 채 떠나보자.


Epilogue


“산골집은 대들보도 기둥도 문살도 자작나무다/ 밤이면 캥캥 여우가 우는 산도 자작나무다/ 그 맛있는 메밀국수를 삶는 장작도 자작나무다/ 그리고 감로 같이 단샘이 솟는 박우물도 자작나무다/ 산 너머는 평안도 땅도 보인다는 이 산골은 온통 자작나무다”- 시인 백석의 ‘백화(白樺)’라는 詩가 이야기하듯 우리의 삶이 간접적으로 묻어난 겨울나무. 영화 ‘닥터지바고’의 개썰매 장면이 각인돼 겨울이면 어렴풋한 향수로 다가온다. 추운 북반구에 서식하는 자작나무가 강원도 인제의 산골마을 원대리와 소양강 기슭 수산리에 있다. 눈이 내린 겨울  색다른 풍경을 전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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