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설


 

 

가을향이 온 몸을 적실 것처럼 진하게 퍼진 들판에 유럽풍 클래식캠핑카 한 대가 서 있다. 차 안의 작은 포트에선 물이 끓고, 고급스런 무채색에 한껏 세련된 니트로 몸을 감싼 미모의 여인이 커피를 타 차 문을 활짝 열고 걸터앉았다. 풍경을 감상하며 두 손으로 컵을 감싼 채 뜨거운 향을 혀로 느낀 뒤 목 안으로 넘긴다. 차 뒤로는 멀찍이 솟아 오른 바위절벽에 뭉게구름이 듬성듬성 떠 있는 푸른하늘과 망망대해가 끝없이 펼쳐져 있고….
모 커피회사의 텔레비전 광고 모습이다. 캠핑카 속 아름다운 여인은 세계적 스포츠스타 김연아.
커피는 어느 새 한국인의 생활 속 한 부분이 됐다. 해마다 수입량이 늘고 올해도 수입 원두가 사상 최대에 이를 것이 확실시 된다. 관세청 수출입무역통계에 따르면 대한민국의 커피소비량이 세계 6위에 올랐다. 부동의 아시아 1위였던 일본을 제쳤고, 러시아를 뛰어넘는 순위다. 수년째 계속되는 경기침체와 불황 속에서도 한 잔에 1만2,000원짜리 커피가 등장해 매장을 늘려 나가는가 하면 알뜰족을 겨냥한 1리터짜리 대용량도 인기다. 전문적으로 커피를 요리(?)하는 바리스타라는 직업도 낯설지 않게 됐다. 우유거품으로 하트 모양이나 나뭇잎 모양을 장식하는 라떼아트를 보고 있노라면 경탄스럽기까지 하다.
커피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국민배우 안성기를 비롯해 한석규, 심은하, 이병헌, 이정재, 장동건에 원빈, 김연아, 공유, 김우빈까지 당대 최고의 스타들이 CF모델로 발탁됐다.
그 안에선 ‘커피 한 잔의 여유’로 대변되는 낭만과 멋스러움이 커피향과 함께 진하게 배어난다. 여행을 하거나, 데이트를 하거나, 심지어 고된 업무 속에서도 커피 한 잔만 들고 있으면 번뇌와 스트레스에서 해방돼 즐겁고 행복할 수 있다고 달콤쌉쌀하게 속삭인다.
혹자는 커피 때문에 전통차가 홀대받는다고 탄식한다. 우리가 언제부터 비싼 외국차에 길들여졌느냐고 힐난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반만 맞는 말이다. 커피를 마시는 모든 사람이 광고 속 스타들처럼 향과 풍미를 즐기기 위해서만 찾는 건 아니란 얘기다.
여행을 하거나 여가를 즐길 때 감초 같은 역할을 하는 게 커피지만, 우리 주위에 커피를 찾는 사람들은 피곤함을 달래기 위해, 쏟아지는 잠을 쫓기 위해, 장시간 노동에 지친 몸과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억지로 커피를 마시다 중독돼 버린 경우가 더 많다.
심지어 부모의 욕심과 성적의 노예가 된 중고등학생들도 커피가 생활화됐다. 시험기간엔 커피보다 훨씬 더 각성효과가 강한 고카페인 음료도 마신다. 아직 다 성숙하지 못한 몸에 고카페인 음료를 들이붓듯 마신 학생이 사망한 사고도 있었다.
어떤 경비원과 미화원들은 자신이 업무시간 중 마실 커피믹스를 두 세봉씩 도시락과 함께 싸 가지고 출근하기도 한다. 커피의 힘 없이는 20~30층을 오르내리며 빗자루와 마대질할 기운이 나지 않고, 카페인의 도움 없이는 노구를 이끌고 노역하며 밤샘근무할 엄두가 나지 않기 때문이다. 1만원짜리 커피가 인기몰이를 하는 이 화려한 시대에 운이 사나워 인색한 단지와 가난한 용역업체를 동시에 만나면 한 봉지에 100원꼴 하는 믹스커피도 자비로 마셔야 하는 것이다.
CF속 커피는 화려하고 매혹적이지만 현실 속 커피는 각박하고 신산하다.
비쩍 마른 미화원과 늙은 경비원이 마시는 커피 한 잔 속에도 양극화가 녹아 들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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