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수의 문화답사


 

 

지하철 종로3가역에서 창덕궁으로 가는 길 주변에는 여러 종류의 표석들이 있다. 얼핏 지나치면 그만이겠지만 그렇지 않다. ‘그때 이곳에서 이런 일도 일어났구나!’, ‘아 여기가 바로 그곳이였군’하고 그 당시를 회상해보고 나름대로 상상의 나래를 펼쳐 보기도 하는 것이다.

#송학선의사 의거 터: 1926년 4월 28일 순종의 승하에 울분한 송학선의사가 금호문 앞에서 조선총독을 살해하려던 자리.
#비변사 터: 조선시대 외적의 방어와 국가 최고 정책을 논의하던 관아 터. 중종 때 창설돼 흥선대원군에 의해 폐지됐음.
#통례원 터: 통례원은 조정의 의례와 하례, 제사와 의식 때 안내를 맡아보던 관청이다. 태조 원년(1392)에 각문이라 했다가 곧 통례문이라 고쳐 불렀고, 1414년에 통례원으로 다시 고쳐서 유지하다가 1896년에 폐지됐다. 통례원은 조선왕조의 정통성을 지키는 데 크게 기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종부사 터: 조선시대 왕실의 족보를 편찬하고 종실을 관리하던 관청인 종부사가 있었던 자리.

내국인은 보이지 않고 중국, 일본 단체관람객만 띄엄띄엄 눈에 보일 뿐 고궁은 적막을 토해내고 있었다. 그늘 밑에서 잠시 쉬어가고 싶기도 하지만 도대체 그럴만한 곳을 찾을 수 없어 내친 김에 이곳 저곳 빠진 곳이라도 있으랴 열심히 돌아다녔다.
창덕궁을 들어서자마자 왼쪽으로 고목 한그루가 턱 버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돈화문 안마당 좌우에 자라는 이들 8그루의 회화나무가 모두 천년기념수다. 나무는 키 15~16m, 나이는 약 300~400년에 이른다.
이곳 회화나무는 1830년 무렵의 창덕궁 그림(동궐도)에 나타나는 것으로 봐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버린 창덕궁을 다시 지을 때 심은 것으로 짐작된다.
돈화문 주변은 조정의 관료들이 집무하는 관청이 배치되는 공간으로 이곳에 회화나무를 싶은 것은 ‘궁궐 정문 안쪽에 괴목(화화나무와 느티나무)을 심고 그 아래에서 삼공(三公)이 나랏일을 논했다’는 중국 고사에 의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궁궐 이외에 학덕 높은 선비들이 사는 마을에 흔히 심었다. 그래서 학자나무라고도 한다.
창덕궁은 1405년 태종 때 건립된 조선왕조의 왕궁이다. 처음에는 법궁(法宮)인 경복궁에 이어 이궁(離宮)으로 창건했지만 이후 임금들이 주로 창덕궁에 거주하면서 실질적인 법궁의 역할을 했다.
임진왜란 때 한양의 궁궐들이 모두 불탄 후에 경복궁은 그 터가 불길하다는 이유로 재건되지 않고 1610년(광해군 2)에 창덕궁이 재건된다. 그후 창덕궁은 경복궁이 재건될 때까지 270여 년 동안 법궁으로 사용됐다.
창덕궁은 인위적인 구조를 따르지 않고 주변 지형과 조화를 이루도록 자연스럽게 건축해 가장 한국적인 궁궐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왕가의 생활에 편리하면서도 친근감을 주는 창덕궁의 공간 구성은 경희궁이나 경운궁 등 다른 궁궐의 건축에도 영향을 줬다.
조선시대에는 궁의 동쪽에 세워진 창경궁과 경계 없이 사용했으며 두 궁궐을 ‘동궐’이라는 별칭으로 불렀다. 또 남쪽에는 국가의 사당인 종묘(宗廟)가, 북쪽에는 왕실의 정원인 후원(後苑)이 붙어 있어서 조선왕조 최대의 공간을 형성했다.
그러나 왕조의 상징이었던 궁궐은 여러 차례의 화재로 소실과 재건을 거치면서 많은 변형을 가져왔고 1991년부터 본격적인 복원사업이 시작돼 현재에 이르렀다. 또한 1997년 12월 6일에 유네스코(UNESCO)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돼 명실공이 한국을 대표하는 궁궐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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