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기용 칼럼

 


류 기 용 명예회장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문제를 둘러싼 ‘역사전쟁’이 가관이다. 한쪽은 현행 8종 검인정 교과서의 ‘편향성’을, 다른 한쪽은 앞으로 나올 국정교과서의 ‘편향 가능성’을 지적하며 다투는 모양새가 마치 조선조 예송(禮訟)논쟁을 보는 듯하다. 이렇게 해묵은 교과서 논쟁이 끝없이 되풀이 되는 이유는 역사적 사실 그 자체보다 정치적 이념 또는 각종 이해관계가 뒤엉켜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소용돌이의 한가운데 정치세력과 지도자라는 위인(爲人)들이 똬리를 틀고 있음은 물론이다.
지난해 연세대 행정대학원 정학준 씨가 ‘한국사 교과서를 둘러싼 갈등 구조 분석’ 논문을 통해 밝힌 연구자료에 의하면 2002년 교과서 갈등은 김대중 정부를 이전 정부와 다르게 치적만 기술해 미화했다는 언론 보도에서 비롯됐다. 이전 정부인 김영삼 정부를 ‘비리 정부’로 규정하고 김대중 정부를 ‘개혁 정부’로 기술했다는 내용이 나오면서 진보와 보수 간에 갈등이 빚어진 것이다. 또 2004년에는 국정감사장에서 한나라당 권철현 의원이 “금성출판사의 교과서가 친북·좌파 편향적인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갈등이 불거졌다. 당시 여당이었던 열린우리당은 한나라당의 문제 제기를 ‘매카시즘’으로 규정하며 반발하고 나섰다. 그후 2012년, 보수 정권인 이명박 정부에서도 ‘한국사 교과서의 좌편향’ 문제가 거론되면서 ‘한국사 필수’ 주장이 제기됐다.
그리고 이제 2015년 가을, 민생 현안 문제를 놓고 머리에 쥐가 나도록 지혜를 짜내도 모자랄 판에 저들은 또 그렇게 비탈진 대척점을 오르고 있다. 그러다 보니 여권과 야권, 진보와 보수 간의 찬반 논쟁이 ‘막말 전쟁’으로까지 치달으면서 온 나라를 두 쪽으로 가르고 있다. 이 같은 갈등과 분열은 해방 당시 찬탁·반탁으로부터 시작된 좌우 대립, 이념 과잉의 산물일 터. 사실 과거 ‘반공을 국시의 제1의’로 삼았던 시절에 좌파 세력은 지하로 숨어들기에 바빴다. 그러다가 민주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우파 세력들이 ‘빨갱이’라 부르던 리영희는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는 말로 그들에게 날개를 달아줬다. 그런데 원래 이 말을 처음 꺼낸 사람은 리영희가 아니라 미국의 흑인 정치인 제시 잭슨이다. 1988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미국 사회의 제도적 병폐를 고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에게 우파 사람들이 ‘좌파’라고 비난하자 그는 “당신네들, 하늘을 나는 저 새를 보시오. 지금 저 새가 오른쪽 날개로만 날고 있소? 왼쪽 날개가 있고 그것이 오른쪽 날개만큼 크기 때문에 저렇게 날 수 있는 것이요”라고 반박했다.
어쨌든 이 양날개론은 좌파나 진보세력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각 분야에서 널리 쓰이고 있다. 하지만 미국과는 달리 남북 분단과 휴전 상태라는 특수 상황 더구나 핵을 머리에 이고 사는 처지에서 그 말을 단순히 멋으로만 받아들이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그 이유는 ‘자유주의자로서의 인간론’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좌파라 해서 모두가 진보주의자가 아닌 것도 문제다. 진보란 모름지기 자유를 사랑하고 평등을 추구하면서 변화와 발전을 도모하되 무엇보다도 약자를 끔찍이 여길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직도 1960년대 낡은 의식에만 갇혀 시대정신에 역행하는 세력은 진보가 아니라 그저 그런 좌파일 뿐이다.
일찍이 정치학자 모리스 듀베르제는 ‘정치의 관념’이라는 저서에서 “소련이든 미국이든 20년 뒤의 국가 발전 청사진은 다를 게 없다”는 말로 정치에 있어서 이념의 무의미성을 지적한 바 있다. 그런가 하면 세계적인 정치 이론가 쉐보르스키는 “오늘의 야당이 내일의 여당이 되고 오늘의 여당이 내일의 야당이 될 수 있는 체제가 민주주의”라고 정의한다. 그런데 우리 정치권은 ‘민주주의 정치체제는 서로 경쟁하는 세력들 간의 공존을 전제로 한다’는 기본조차도 모르고 있는 듯하다. 소설가 이병주는 실록대하소설 ‘산하’에서 “태양(太陽)에 바래지면 역사가 되고 월광(月光)에 물들면 신화가 된다”고 했다. 검인정이건 국정이건 역사 교과서의 최우선 가치는 객관적인 사실의 서술이다. 어쭙잖은 자랑질이나 정치적 입김은 철저히 배제돼야 한다.
역사에 좌우는 없다. 역사와 과거사가 있을 뿐이다. 여야 정치권은 이제 정쟁과 이념 대립을 멈추고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민생이나 조국의 안위보다 더 높은 가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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