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여행


이 성 영  여행객원기자
laddersy@hanmail.net

 

 

화절령 가는 날은 봄, 여름, 가을 수 만 송이 야생화가 다시 하얗게 필 겨울 능선.
백두대간 꽃의 혼들이 저마다 소리 없는 바람으로 날아와 귓전에 시린 울음으로 남던 날.
그 곳에 떨구고 간 우리의 발자국도 꽃으로 피었으면.

 

▲ 만항재의 야생화

야생화는 홀로 피지 않는다

봄부터 가을까지 함백산은 야생화가 만발한다. 금대봉, 은대봉 함백산을 따라 만항재로 이르는 백두대간 길은 사시사철 꽃길이다. 봄의 야생화는 다른 초목이 자라기 전 빨리 깨어나 수줍게 핀다. 복수초 노루귀, 얼레지 등은 동토의 땅에서 깨어나 봄을 알리고는 어느새 모습을 감춘다. 그러기에 봄의 야생화들은 발 밑을 보지 않으면 얼굴 보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여름 야생화들은 화려하다.
7월 초부터 범꼬리가 초록의 산정을 물들이기 시작한다. 물레나물, 태백기린초, 동자꽃, 둥근 이질풀, 짚신나물, 터리풀, 노루오줌 등 각종 야생화가 화려하게 피어나며 늦여름까지 벌과 나비들을 유혹한다. 무더위가 지나고 가을이 됐는데도 여름보다 더욱 뜨거운 날이 있다. 미국의 캘리포니아 지방에서는 인디언 썸머라고 한다. 마지막 좋은 계절에 더욱 많은 수확물의 기회를 부여한다는 시기일까. 인생기로 말하면 마지막 황금기의 시간을 못해 보았던 것을 하라는 의미일 수도 있다. 그러기에 가을이면 투구꽃, 쑥부쟁이, 벌개미취 진범, 놋젓가락나물 등의 보라색 꽃들은 더욱 대범하게 짙은 화장을 한다. 마지막 계절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야생화는 낮은 곳 보다는 높은 곳에서 생명력이 강하다. 야생화는 홀로 피지 않는다. 작은 꽃이기에 무더기로 피어 벌과 나비를 불러 모은다. 꽃의 색깔도 진하고 예쁘다. 우리나라 최고봉인 백두산도 수목 한계선인 2,000m부터 각종 야생화가 발 디딜 틈 없이 핀다. 온도가 낮은 탓에 빨리 개화하여 씨를 퍼뜨린다. 키 큰 나무가 없고 수시로 생기는 운해가 습도를 적절하게 유지해 주어 꽃이 피기 좋은 여건을 만들어 준다. 안개가 넘어가는 만항재는 여름에도 서늘하여 긴팔을 입을 정도다. 수시로 넘어 오는 운해가 꽃잎을 적신다. 봄부터 피던 꽃들은 여름을 지나 가을까지 천상의 화원을 만든다.

 

▲ 타임캡슐공원

시간이 멈춰 있는 산자락

늦은목이로 불리는 만항재의 고도가 1,330m다. 남한 내륙의 최고봉 지리산의 정령치(1,172m)보다 높다. 정선 사북에서 태백으로 넘어가는 고도(高道). 자동차로 넘는 최고 높이의 포장된 지방도다. 오름길의 정암사와 옛 탄좌 마을인 만항마을을 지나면 만항재에 이른다. 만항재에서 선수촌과 태백산 쪽 화방재로 가는 두 갈래 길이 있고, 작은 휴게소 우측으로는 좁은 임도가 있다.

▲ 운탄고도의 가을

임도 길은 석탄산업이 한창이던 시절에 석탄을 나르던 석탄 길이었다. 중국 윈난성과 티베트의 차와 말을 교역하던 험난한 차마고도(茶馬高道)에서 유래돼졌을 지명을 누군가가 만들었다. 구름 위에서 석탄을 운반했던 높은 도로인 운탄고도(雲炭高道)라는 지명이다. 해발 천여미터의 높이의 길이 구불구불 산들의 어깨를 감싸며 백운산, 두위봉, 질운산을 지나 함백역에 이르기까지 30km의 비포장 길이다. 이제는 임도의 역할로 산자락의 풍경들을 간간이 전할 뿐이다. 함백산의 꽃들은 백두대간을 따라가다 이 길들에서 머무르곤 한다. 천여미터의 고도에서 만나는 풍경들. 운탄고도는 깎아지른 벼랑길과 아늑한 숲길이 교대로 이어진다. 화절령에 이르면 갱도가 침하돼 생긴 자연 연못이 있다. 다롱이, 아롱이 연못이다.
하이원리조트 뒤편 산책로에서 올라오는 지점과 만나는 화절령은 백운산과 두위봉 사이 정선과 영월로 나무꾼들이 넘어가던 길이다. 지방 사람들은 꽃꺽이재라고 부른다. 진달래꽃 가지를 꺾으며 콧노래를 부르며 넘었을까. 두위봉, 질운산의 어깨에 기댄 신록과 야생화길. 가을 들꽃과 단풍이 뚝뚝 떨어지는 낙엽의 길. 한 굽이를 돌면 또 어떤 풍경들이 펼쳐질까. 길의 끝이 다다름이 아니라 계속 이어지기를 아쉽게 생각하며 걷는 길. 산과 산들의 그림자들이 길과 수평으로 만나는 길. 그리고 ‘운탄고도’의 길 끝에 마치 선물처럼 등장하는 새비재의 탁 트인 고랭지 배추밭의 풍경들. 능선 너머로는 푸른 산자락의 그림자들이 수묵화를 그린다. 그 길의 끝에는 영화 ‘엽기적인 그녀’에서 타임캡슐을 묻었던 소나무 한그루가 있다. 그녀가 캡슐이 묻혀있는 소나무를 다시 찾아갔을 때. “예전의 소나무는 벼락을 맞아 죽고 어느 청년이 비슷하게 생긴 새 소나무를 심었지”라는 어느 노인에게서 비밀 이야기를 들었던 곳. 고랭지 밭 위의 타임캡슐 공원은 구절초가 한창이다.
일본의 유명작가 츠지히토나리는 ‘편지’에서 “실은 시간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 거야. 시간이 흐른다고 사람들은 말하지만, 흐르는 건 사람이고 시간은 언제나 이렇게 멈춰 있는 것” 이라고 했었지. GMC트럭이 검은 가루를 뿌리며 먼지를 일으키던 그 길 자리마다 꽃이 피었다. 홀로 피지 않는 야생화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는 작은 함석지붕들. 광부들은 떠났지만 수건을 두른 검은 얼굴에 눈빛만 반짝이는 사람들이 아직 남아있을 것 같은 동네. 숫자가 반대로 새겨진 시계탑에 이제는 익숙해졌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 함백의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풍경들도 만나본다. 현재는 미래에서의 어떤 모습으로 각인이 될까. 이제 가을빛이면 가벼운 바랑 하나 짊어지고 어디론가 떠나 볼 일이다.

▲ 새비재의 고랭지 채소밭

여행 TIP
운탄고도는 정선, 사북의 하이원리조트에서 곤도라를 타고 백운산의 마운틴탑에서 화절령으로 접근이 손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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