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세상

 

 

오 정 순  수필가

며칠 전 삼계탕을 먹으면서 남편이 살을 정교하게 발라먹지 않고 대강 뜯다가 버리는 것을 보았다. 그래도 인간의 일부가 되는 행운을 얻었는데 이왕이면 철저히 먹어줘야 닭이 좋아하지 않겠느냐는 말을 하면서 혼자 실실 웃었다. 왜 웃느냐고 묻기에 닭을 먹었으니 내일 아침 인사는 꼬끼오로 할 거라고 했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에는 잊어버렸다.  
며칠이 지나 남편이 월드컵 중계를 보기 위해 일찍 일어났는데 나는 더 일찍 일어나 서재에 있다가 문 앞에서 마주쳤다.
“꼬끼요~”
이번에는 남편이 잊어버렸다. 
나는 결혼하면서 가장 먼저 마음 쓴 일이 바로 부부의 인사법이었다. 특히나 아침에 나갔다가 저녁에야 들어오는 남편이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면서부터 나의 관심에서 밀려나는 느낌이 들었다. 하루에 한번만이라도 아버지의 시간을 줘야겠다는 마음을 먹고 아침마다 두 아이를 데리고 아파트 앞 전봇대가 있는 곳까지 나가 배웅을 했다. 그 일은 1층에 살아서 가능했고 승용차가 생기고부터는 유야무야 없어졌다.
그러다가 동생네 남편이 어머니의 부고를 듣고 가장 먼저 가슴 아파 한 것은 전날 밤의 인사였다. 눈도 마주치지 않고 “엄니 또 올께유” 한 것이 마음에 걸린다고 했다. 나는 그날부터 다시 남편에게 인사를 시작했다.
그 인사법은 조금 별나게 개발했다. 청담동에서 여의도까지 가려면 거의 한 시간 가량 가는데 그동안 웃음이 사라지지 않을 만큼 시간을 두고 해야 했다. 눈을 마주치는 것은 필수고 스킨십이나 말도 곁들여야 했으니 그 일만으로도 아침이 번거롭게 됐다. 나물을 무치다가 비닐장갑을 벗어야 하고 긴 팔의 옷을 걷어붙여야 했다.  
늘 “바쁘다 바뻐” 하고 사는 사람이라 빨리 인사를 치르기 위해 눈을 순식간에 부릅뜨는가 하면 팔을 마치 이발소 칼 갈듯이 쓱쓱 문대기도 했다. 나는 그 인사법은 남편을 괴롭히는 것 같아 얼른 접 었다. 다시 개발하고 개발해 정한 규칙없이 대고 바꾸기로 했다.
누군가가 파마가 잘 나오고 뒷머리가 더 볼품 있다고 말해주면 뒷머리로 인사하기도 하고 바깥에서 우스운 이야기를 듣고 오면 아침에 들려주기도 했다. 씨익 웃고 나가지만 그 웃음이 직장에 도착할 때까지 이어지기를 바라는 게 내 속셈이었다. 그러다가 또 유야무야 하게 됐다.
아이들을 출가시키고 둘이 남아있으니 밥 한그릇을 다 먹으면서도 특별한 말을 할 것이 없으면 조용히 밥만 먹을 때가 있다. 그래도 아무렇지 않다. 하지만 아침에 일어나 부시럭거리며 움직이는데 인사말이 없이는 사는 게 싱겁다. 그래서 나는 식상하지 않을 만큼 종종 인사말을 바꿔보기로 했다.
“여보 안녕?”하던 것을 손녀 버전으로 “하비 안낭”했다. 아이 생각이 나서 웃었다. 말을 배우면서 ‘함머니 앙강 (할머니 안경)’하던 것이 어찌나 정겹고 귀엽던지 종종 남편과 부딪칠 때면 “여보 앙강” “하부지 사당해요”(할아버지 사랑해요) 해준다. 무엇인가 걱정스러워 하면 “거쩡마”(걱정마)하고 “당연히 유치원에 가야지요. 아마도 재미있을 거예요”하던 손녀버전으로 인사말을 대신하기도 한다. 그 인사말을 쓸 때마다 기분이 되살아나서 좋다.
성서의 곳곳에서 슬프고 걱정을 많이 하면 피가 썩는다고 하고 화를 내고 분노를 하면 뼛속의 피가 마른다고 돼있고 흐뭇한 감정이 피어나면 마른 가지에 새순이 돋는 것처럼  뼛속이 싱싱해진다고 돼있다. 요즈음에는 나이에 걸맞은 인격적인 관계로 이어지는 자리에 가면 기분이 좋아지고 흐뭇해진다. 관절통도 줄어든다. 그래서 나는 가능하면 웃고 살려고 노력한다. 나는 우리집 아침 인사말을 연구하는 ‘인사말 연구소장’이다. 오늘 아침에는 7살박이 손녀가 사촌 여동생을 달랠 때 하던 말을 했다.
“너는 얼굴도 예쁘고 마음씨도 고운 아가씨잖아. 울지 마”란 말로 그날의 흐뭇한 풍경을 기억에서 불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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