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수의 문화답사

 

◈대왕암
이곳 대왕암이 문무왕의 유골장치가 있다는 설도 있지만 이는 본격적인 발굴조사로 증명된 사실은 아니다. 하지만 왠지 그곳이 수중릉일 것이란 생각이 자꾸 드는 것은 왜 그럴까?
사람은 생각을 바꾸면 모든 것이 그럴듯하게 바뀌는 것일까. 대왕암을 바라보면서 당시의 시대상황을 상상해 보는 것은 참으로 복 받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며 대왕암이 바로 보이는 바닷가에 서서 철썩이는 파도 속에 실려 오는 문무대왕의 말씀을 들어본다.
문무왕은 아버지대의 백제정벌(660)에 이어 고구려 정벌(668)을 승리로 이끌었으며 이후 신라에 대한 당의 야심을 알아채고 그 세력을 몰아내는 전쟁까지 치러냈다. 삼국을 하나로 통일하는 대업을 마무리해 명실 공히 통일신라의 찬란한 문화시대를 연 문무왕은 평소에 이렇게 유언했다.
“이때까지 우리 강토는 삼국으로 나눠져 싸움이 그칠 날이 없었다. 이제 삼국이 하나로 통합돼 한 나라가 됐으니 민생은 안정되고 백성들은 평화롭게 살게 됐다. 그러나 동해로 침입해 재물을 노략질하는 왜구가 걱정이다. 내가 죽은 뒤에 용이 돼 불법을 받들고 나라의 평화를 지킬 터이니 나의 유해를 동해에 장사 지내라. 화려한 능묘는 공연한 재물의 낭비이며 인력을 수고롭게 할 뿐 죽은 혼은 구할 수 없는 것이다. 내가 숨을 거둔 열흘 뒤에는 불로 태워 장사할 것이요, 초상 치르는 절차는 검소와 절약에 좇아라(‘삼국사기’ 문무왕 21년(681)조)”
또한 삼국유사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신문왕은 681년 7월 7일 즉위했다. 아버지 문무대왕을 위해 동해변에 감은사를 세웠다. 문무왕이 왜병을 진압하고 이 절을 짓다가 마치지 못하고 돌아가 바다의 용이 됐는데 그 아들 신문왕이 즉위해 682년에 마쳤다. 금당 계단 아래를 파헤쳐 동쪽에 구멍을 냈으니 용이 들어와 서리게 한 것이었다. 생각건대 유조로 장골(葬骨)케 한 곳을 대왕암이라 하고 절은 감은사로 했으며 그후 용이 나타난 것을 본 곳을 이견대라 했다”
대왕암은 사적 제158호로 지정돼 있다. 문무왕의 화장과 관련된 유적지로는 문무왕의 화장터로 알려지고 있는 능지탑이 있으며 경주 배반동 낭산 기슭에 있다.

 

대왕암/ 고유섭

대왕의 우국성령은/ 소신(燒身) 후 용왕 되사/ 저 바위 길목에/ 숨어들어 계셨다가/ 해천을 덮고 나는/ 적귀를 조복하시고// 우국지정이 중코 또 깊으시매/ 불당에도 들으시다/ 고대에도 오르시다/ 후손은 사모하여/ 용당이요 이견대라더라// 영령이 환현하사/ 주이야일 간죽세로 부왕부래 전해주신/ 만파식적 어이하고/ 지금은 감은사 고탑만이/ 남의 애를 끊나니// 대종천 복종해를/ 오작아 뉘지 마라/ 창천이 무섭거늘/ 네 울어 속절없다/ 아무리 미물이라도/ 뜻 있어 운다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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