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용수의 에세이


 

 

아버지는 낮잠을 자고 아이는 호수에 몸을 던진다.
해하 전투에서 패한 항우가 오강(烏江)에 몸을 던지는 건 자결이지만 이곳 아이들이 몸을 던지는 건 자맥질이요 물놀이다.
“힘이 산을 뽑고 기세가 세상을 덮어도, 시운이 불리하니 명마 추(?)도 달리지 못하고 준마가 달리지 못하니 사랑하는 저 우희를 어찌할거나.” 항우의 해하가(垓下歌)는 슬프지만 톤레샵의 노래는 퐁당퐁당 물장구로 신명이다. 마음이 머물면 어디든 고향인가 보다.
반갑다는 ‘썹서바이’를, 매우 고맙다는 ‘어꾼찌란’을 일상용어로 쓰는 멋진 사람들에게 영광이 있을진저.
비로자나의 법신이나 아미타불의 보신은 인간이 사는 속세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으니 천백억 화신으로 속세에 온 석가모니 부처가 1달러를 외치는 저 캄보디아의 눈 맑은 아이들인지도 모르겠다. 수상촌의 집집마다가 모두 법당이 아니던가. 수상촌은 톤레샵 호수 위에 핀 커다란 연화장세계요, 무량청정토다. 빨래도, 목욕도, 식수도, 배설도 함께 뒹굴지만 배탈이 없어 설사도 없고, 병에도 안 걸려 병원도 필요 없다.
침착하고 조용한 사랑이라는 옥잠화의 꽃말처럼 톤레샵 호수의 옥잠화와 혈액순환과 신진대사를 촉진하고, 불면증과 피로회복에 도움을 주는 황토가 정화작용을 한단다. 캄보디아 총 어획량의 60%가 이곳이라니 톤레샵은 노을만큼이나 아름다운 캄보디아의 보배다. 
이곳은 태풍이 없다는 가이드의 말에 안심을 하고, 몸에 좋은 황토의 톤레샵 호수는 그들에게 커다란 물침대라고 나는 굳게 믿으며 와트마이로 간다.
미니 킬링필드요, 새로운 사원이라는 와트마이 사원은 언어폭력일지 모르지만  한마디로 해골사원이다.
신의 궁전이 있고 신의 미소가 있는 나라에 신의 축복은 어디로 간 것일까. 인간의 잔인성에 관한 또 하나의 불가사의가 와트마이 사원이다. 킬링필드 추모사원이라는 와트마이 사원은 차라리 말로만 전해오는 전설이나 신화였으면 얼마나 좋으랴.
가이드 홍 부장은 가이드생활 10년이 넘었는지라 슬픔도 잊은 채 저 해골들을 향해 잔인한 학살을 열심히 아무렇지도 않게 거침없이 늘어놓는다. 200만이니, 캄보디아 전체 인구의 삼분의 일이니 하는 대학살을.
저 유리관 속의 수많은 유골들이 캄보디아의 지식인들이 잠자는 현주소다. 선생, 승려, 군인, 안경 낀 사람, 배 나온 사람, 영어 잘하는 사람, 손에 굳은살이 없는 사람, 피아노를 잘 치는 사람,  파마한 사람, 그리고 지식인들은 모두 학살됐다는 킬링필드.
폴 포트의 대학살이 문맹률 90%, 가난과 기아, 질병의 굴레 속을 아직도 헤매게 하고 있다. 전시관이 아니라 위령관이다. 눈물이다.
아직도 너무 억울하여 서방정토로 가지 못하고 구천을 떠도는 영가들이 있다면 어찌하랴. 6·25때에는 우리를 도운 캄보디아가 아닌가.
낙동강 동남쪽에 있는 경상도 지역의 ‘아랫녘수륙재보존회’가 킬링필드의 아픔을 간직한 와트마이 사원에서 희생자의 넋을 기리는 천도 위령제를 올렸다.
대한민국의 전통 범패와 작법, 천수바라춤이 얼마나 위로가 되겠느냐만, 인간의 존엄과 생명의 존중에 대한 눈물을 함께 한다. 이제 통합과 소통으로 지구촌의 눈물은 영원히 함께 해야 할 사랑의 공통분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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