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세상

오 정 순  수필가

 

 

창밖을 보라,  창밖을 보라,  꽃눈이 내린다
창밖을 보라,  창밖을 보라,  잎눈이 돋는다
동요를 개사해 노래를 불러본다. 강아지들이 눈밭으로 달리듯 나는 꽃나무가 있는 곳으로 가고 싶어 창밖을 본다. 투어길에 나선다. 싱그러움과 환희심을 말해 무엇하랴. 아웃도어의 범람으로 곳곳마다 사람꽃이 풍성하다. 자연물을 구경하나 사람을 구경하나 식상하지 않으면 내겐 호재다.
그러나 이동하라고 봐주는 것도 잠깐, 비가 내린다. 단비, 약비, 궂은 비 이름도 많다. 내겐 통증 비, 절제 비가 돼 준다. 멈추라는 신호다. 
보건소에서 처방전 나오기를 기다린다. 다른 사람 것보다 더디 나오니까 직원이 괜스리 미안해 한다. 나는 길거리에서 연둣빛 향연을 벌이는 나무를 만나고 기분이 좋아진 터라 그 정도 기다림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지리리릭…”
드디어 프린터에서 처방전이 미끄러져 나왔다. 나는 처방전을 받아들며 상냥하게 인사하고 나오는데 여직원이 나를 불러 세운다.
“왜요?”
“500원 내셨어요?”
“지난 번에는 안 냈는데요”
“65세 미만은 내야 해요”
“저 68세인데요”
“주민증 보여주세요”
 여자가 알아보지 못한다는 게 더 재미나다.
‘의심이 갈 만큼 젊어보인단 말이지. 음 좋지 좋아. 4년을 벌었네.
쾌감을 감추고 조용히 보건소를 빠져나왔다. 곳곳의 정원수와 가로수를 만날 생각을 하니 흥미진진해진다. 지난밤에 봄비가 다녀가더니 천지가 낙원이 됐다. 볕은 눈부시고 공기는 상큼하다. 갓 돋은 사철나무 잎은 번들거리고 느티나무잎은 연둣빛 갑사치마를 입고 하늘거린다. 지각생 감나무는 이제사 기지개를 켠다. 비록 약을 타가기는 하지만 ‘룰루랄라’ 신이 난다.
불과 이틀 전만 해도 하르르 하르르 날리는 벚꽃으로 세수를 했는데 메타스퀘어 이파리로 마사지를 하고 영산홍꽃으로 화장을 한다. 4년을 버는데 일등공신은 아마도 봄나무의 꽃인가 보다. 그게 어디인가.
‘걸어야지 부지런히 걸어야지…’
 다리가 시큰거린다. 웃으면 뼛속으로 살이 찌고 걱정이 많으면 뼛속의 피가 마른다는데, 나는 울었다 웃었다에 따라 다리가 말을 한다. 하늘이 구름을 품으면 다리가 아프고 청명하면 내 다리도 웃는다. 그러나 세월이 뼛속에 나이를 새기면 어쩔 수가 없다. 웃음이 들어가기 전에 세월이 먼저 들어가 자리를 잡으니 별 도리가 없다. 무슨 수로 세월을 버나. 앞으로 남고 뒤로 믿지는 게 세월 계산법이지. 인생이지. 얼굴이 화끈거린다.
화장품 바꾸듯 다른 나무를 보고싶어져 오던 길과 다른 길로 간다. 걸으면서 다시 생각한다.
“립서비스용 멘트와 업무처리용 멘트는 진정성에 차이가 있긴 해. 마음과 불편한 다리와는 별개야. 맞아.”
생각을 고쳐먹으니 행복감이 배가된다. 4년을 번 기념으로 봄날 거리의 우동집에서 한 끼 축제를 벌인다. 돈까스와 우동을 시키며 40년 전을 생각해본다. 누가 나이듦이 싫다고 했는가. 나에게 이런 날이 오려고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그렇게 울었고’ 태양은 내게만 비추듯 인생이 그토록 지글지글 끓었나 보다. 때로는 한숨이 태풍으로 불어가고 번뇌로 밤이 길지 않았던가. 
하늘이 하늘답게 보이고 나무가 나무답게 보이니 나도 허리 굵어진 나무 한그루다. 올해도 감성의 움을 틔워주니 짜릿하게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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