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 설

 

 

“세월호 사건은 어떻게 됐나요?”
프란치스코 교황이 지난달 초 로마 교황청에서 한국 주교단을 만나자마자 던진 첫 질문이었다. 지난해 8월 한국을 찾아 유가족을 위로했던 교황은 반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세월호 참사를 잊지 않고 있었다. 감동과 감사의 마음이 일면서도 한편으로 자괴감이 드는 건 무엇 때문일까.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여객선이라던 배는 한 번 옆으로 넘어지더니 그대로 가라앉아 버렸다. 충분히 살릴 수 있었던 수백 명의 희생자들이 갑판으로 나와 보지도 못한 채 수장되는 모습을 전 세계가 실시간 생방송 화면으로 지켜봤다.
겉으로 빈 배처럼 보였던 세월호는 조용히 침몰했지만 그 안에서 얌전히 대기하다 어처구니없이 죽임을 당한 아이들이 보내 온 휴대폰 속 동영상은 대한민국뿐 아니라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렸다. 아이들이 겪었을 경악과 공포는 생각하기조차 끔찍하다.
차가웠던 바다는 봄을 보내고 여름을 지나 더 차가운 가을과 얼음장 같은 겨울을 겪었다. 그리고 다시 봄이 왔다. 1년이 지난 오늘까지 아홉의 생명이 그 바닷물 속에 갇혀 있을 것이라 그 누가 상상이라도 했을까.
이것이 대한민국의 민낯이다. 정확히 이 만큼까지 우리 수준이다. 많은 사람들이 정부를 믿었고 해경과 해군을 믿었다. 대한민국의 공권력을 믿었다. 살리진 못했을망정 최단시간에 건져주리라 믿었다. 그 믿음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었는지 깨닫기까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지만.
‘라이언 일병 구하기’라는 영화가 있다. 박진감 넘치는 전개와 실감나는 영상이 압권인 전쟁영화다.
2차 대전의 치열한 전황 속에서 미 정부는 전사자 통보업무 중 충격적인 사실을 발견한다. 4형제 모두 참전한 라이언 집안에서 며칠 새 3형제가 전사하고 막내 제임스 라이언 일병만 생존해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네 명의 아들 가운데 셋을 잃은 어머니를 위해 미 정부는 막내 제임스를 구하기 위한 특별작전을 지시한다. 영화는 단 한 명의 병사를 구출하기 위해 여덟 명의 특공대가 투입돼 결국 대부분 전사해 가는 과정을 감동적으로 담아냈다.
경제논리로 따지자면 이 영화의 내용은 매우 비효율적이다. 생명은 누구에게나 가장 소중한 것인데 어떻게 한 사람을 구출하자고 여덟 명을 사지로 내몰 수 있단 말인가. 특공대원들이 갖는 거부감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기꺼이 죽음을 감수하고 사지로 뛰어들어 장렬하게 산화했다. 비효율적인 작전이었지만 단 한 사람을 구해내는 임무는 완수했다.
그것이 국가다. 특공대원들이 목숨을 던질 수 있었던 건 국가에 대한 믿음과 존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아들 셋을 잃은 어머니에게 남은 아들마저 잃게 만들 수 없다는 국가의 의지가 그들을 움직인 것이다.
세월호 인양을 둘러싼 반대논리가 심심치 않게 고개를 든다. 엄청난 장비와 시간과 노력과 천문학적인 돈이 들어가는 일을 과연 할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다. 경제논리로만 따지면 틀리다고 하긴 어렵다. 어쩌면 그 돈의 절반만 유족들에게 나눠줘도 남은 가족들이 평생을 돈 걱정 하지 않고 풍족한 삶을 살다가 후세에까지 물려줄 수도 있는 어마어마한 액수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건 국가가 할 짓이 아니다. 자본의 논리는 고인과 유가족에 대한 모독이다.
혹 내가 물에 빠졌을 때 구조될 것이란 믿음이 없다면 어떤 국민이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갖겠는가. 전쟁터에서 고립무원의 궁지에 몰려 있을 때 국가가 구출에 나설 것이란 확신이 없다면 어떤 군인이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겠는가.
세월호 유족들은 자신들을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다. 일상생활 속에서 그 어떤 사고를 당할지도 모르는 우리를 위해 싸우는 것이다.
세월호 인양에 돈을 결부시키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과연 얼마를 주면 당신의 아들 딸, 또는 부모나 형제자매를 차가운 바닷물 속에 버려둘 자신이 있는가?
얼마면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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