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수의 문화답사

 

◈경주 월성(月城)
사적 제16호로 등록돼 있으며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 387-1에 소재해 있는 이 곳은 신라시대 궁궐이었던 곳이다. 지형이 초승달처럼 생겼다고 해 신월성 또는 월성이라 불렀으며 임금이 사는 성이라 해 재성(在城)이라고도 했다. 조선시대부터 반월성이라 불러 오늘에 이른다.
잡초만 무성한 궁궐 뜰을 거닐며 생각해본다. 그 시절 내가 신라의 백성이었다면 무엇을 생각하며 이 궁궐을 바라봤을까? 어느 시대나 다 마찬가지겠지만 위정자와 백성들의 생각과 생각은 다르기 마련이고 그래서 요즘 흔히 하는 말로 소통이 중요한 것이다. 이렇게 유서 깊은 궁궐터를 예전과 같이 복원할 수는 없는 것일까? 쓸쓸한 생각을 지우며 그래서 문화유적을 잘 관리해 후손 대대로 물려줘야 할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을 해본다.
이성을 쌓기 전에는 ‘호공’이라는 사람이 살았는데 석탈해 왕이 어렸을 때 꾀를 내어 이곳을 차지했다고 한다. 남해왕이 그 이야기를 듣고 석탈해를 사위로 삼았으며 신라 제4대왕이 됐다는 전설도 있다. 그 후 파사왕 22년(101)이 여기에 성을 쌓고 옮긴 다음부터 역대 왕이 월성에 살게 됐다. 남문, 북문, 인화문 등과 임해전으로 통하던 임해문이 있었으며 그 밖에 많은 부속건물들이 있었다. 성 안에는 조선시대 얼음 창고인 석빙고가 남아 있다.

◈경주 첨성대
국보 제31호로 지정돼 있으며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 839- 1에 소재한 첨성대는 신라 선덕여왕(632~647)때 만들어진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 관측대다. 화강암을 가공해 조성한 기단 위에 27단의 석단을 원통형의 곡선으로 쌓아 올리고 그 위에 장대석을 우물 정자(井)으로 축조해 정상부에서 천문을 살피도록 시설돼 있다.
정남쪽의 석단에는 아래로부터 제13단과 제15단 사이에 네모난 출입구가 있어 내부로 들어갈 수 있게 돼 있고 이 출입구 아랫부분 양쪽에는 사다리를 걸쳐 오르내리도록 돼 있다. 이곳을 통해 꼭대기에 올라 하늘을 관찰했던 것으로 보인다. 규모는 밑면의 지름이 5.17m, 높이가 9.4m이며 지대석 한 변의 길이는 5. 35m다. 신라시대의 석조물로 직선과 곡선이 잘 어루러진 안정감 있는 건축물이다.

◈첨성대 구조의 상징성
첨성대는 신라도기 중 그릇을 받쳐주는 기대의 모양과 닮은 꼴로, 단정한 모습으로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받침이라는 뜻이다. 몸체는 모두 27단으로 맨 위에 마감한 정자석과 합치면 28단이다. 기본 별자리 28수을 상징한다. 여기에 기단석을 합치면 29단이다. 한달의 길이를 상징한다. 몸체 남쪽에는 네모난 창이 있는데 그 위로 12단, 아래로 12단이니 이는 1년 12달과 24절기를 상징한다. 돌의 숫자 366개 즉 1년의 날수 태양의 움직임을 관측하는 기준이 되는 일정한 기능이다. 기단석은 동서남북 4방위에 맞추고 맨 위 정자석은 그 중앙을 갈라 8방위에 맞췄으며 창문은 정남이다. 정남으로 향한 창은 춘분과 추분, 태양이 남중할 때 광선이 첨성대 밑바닥까지 완전히 비치게 돼 있고 하지와 동지에는 아랫부분에서 완전히 광선이 사라지므로 춘하추동의 분점과 지점 측량 역할이다. 첨성대가 세워진 것은 선덕여왕때이다. 첨성대 문체가 27단으로 된 것도 선덕여왕이 27대 왕이라는 상징성을 띠고 있다. 선덕여왕 시절의 문화는 천년 신라 역사 속에서 아주 독특하고 뚜렷한 자취를 남기고 있는데 첨성대도 그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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