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수의 문화답사

 

◈금강역사상
이 두 구의 금강역사상는 본래 분황사 동쪽 도로 건너편 구황동 절터에 있었고 1915년 경주박물관으로 옮겨왔다. 이 절터에는 지금도 석탑 지붕돌, 주춧돌과 함께 네 구의 금강역사상이 남아 있다. 또 이 절터에서 분황사 모전석탑과 같은 안산암으로 만든 벽돌 모양 석재 등이 발견돼 이 절터에도 분황사처럼 모전석탑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아마 이 금강역사들도 분황사 모전석탑처럼 구황동 절터 모전석탑 감실 입구 좌우에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금강역사는 불교가 성립된 이후 부처님과 그 가르침을 지키는 수호자의 역할을 하게 됐다. 그런데 왜 꼭 쌍으로 만들었을까?
금강역사를 자세히 보면 왼쪽 금강역사는 입을 벌리고 있고 오른쪽 역사는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입을 벌린 모습을 아(阿)형 이라 하고 입을 다문 모습을 흠형이라 한다. 범어로 ‘아’는 입을 벌렸을 때 나는 가장 첫소리고 ‘흠’은 입을 다무는 마지막 음성이라고 한다. 입을 벌리고 있는 금강역사와 입을 다물고 있는 금강역사를 함께 두는 것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항상 부처와 그 말씀을 지키겠다는 굳은 의지를 담았던 것이다.

◈돌로 탑을 쌓은 이유는 무엇일까?
석탑은 석조탑파(石造塔婆)를 줄인 말이다. 스투파(Stup)라는 말을 한자로 옮긴 것으로 부처의 유골 진신사리를 묻은 무덤을 뜻한다. 인도의 탑은 원래 돌이나 진흙을 이용해 돔 형태로 만들었다. 불교와 함께 주변으로 전래됐는데 중국은 진흙 벽돌을 이용한 전탑(塼塔), 일본은 목탑을 많이 만들었다.
우리나라는 ‘석탑의 나라’라고 불릴 만큼 석탑이 많다.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 불교를 수용한 이후 쉽게 구할 수 있는 돌을 이용해 석탑을 새롭게 만들기 시작했다. 처음의 석탑은 목탑과 비슷한 모양으로 만들었는데 이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만든 석탑으로 생각되는 익산 미륵사터 석탑에서 잘 알 수 있다.
돌로 탑을 쌓았던 이유 중 하나는 목탑이 불에 잘 탔기 때문일 것이다. 높이가 약 80m로 추정되는 황룡사구층탑은 그 도시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었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황룡사구층탑은 몽고군에 의해 불타 없어지기까지 무려 다섯 번이나 벼락을 맞고 여섯 번 다시 고쳤다고 한다.

◈한국 석탑의 모범이 된 신라 석탑
신라는 목탑을 돌로 재현한 백제와 달리 중국의 전탑 같은 모습의 분황사 모전석탑을 만들었다. 이 모전석탑은 안산암을 벽돌처럼 다듬어 차곡차곡 쌓은 석탑이다.
그렇다면 2단으로 된 높은 기단, 삼층의 몸돌(탑신)과 지붕돌(옥개석)의 탑신부, 여러 단의 지붕, 꼭대기 장식(상륜부)으로 이뤄진 신라 석탑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고구려와 백제를 아우른 신라는 삼국의 문화를 융합해 세련되고 정제된 문화를 꽃피웠는데 이 시기 석탑은 목탑과 전탑의 특징을 두루 갖추고 있다. 2단으로 된 기단과 지붕, 기둥 표현 등은 목탑의 흔적이며 여러 층의 지붕 받침은 전탑의 흔적으로 볼 수 있다.
석탑을 만들기 시작한 7세기 후반의 감은사터 삼층석탑은 기단부터 3층 지붕까지 무려 820장의 돌로 짜 맞췄다. 그런데 규모가 점점 작아지는 8세기 중엽의 불국사 석가탑은 22장의 돌로 만들었다. 9세기에는 22장이 채 안 되는 것도 있다. 탑의 규모가 작아지면서 8세기에 비해 9세기에는 무려 다섯 배가 많은 석탑이 만들어지게 된다. 이처럼 전체적으로 초기 탑의 형태를 유지하면서 만들기 쉽게 변화했음을 알 수 있다.

 

                     ▲금강역사상                ▲분황사 모전석탑

저작권자 © 한국아파트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