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마여행


이 채 영 여행객원기자
채이월드(myknight86.blog.me)
 
어제도 사막 모래 언덕을 넘었구나 싶은 날
내 말을 가만히 웃으며 들어주는 이와
오래 걷고 싶은 길 하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나보다 다섯 배 열 배나 큰 나무들이
몇 시간씩 우리를 가려주는 길
종처럼 생긴 때죽나무 꽃들이 오리 십 리 줄지어 서서
조그맣고 짙은 향기의 종소리를 울리는 길
이제 그만 초록으로 돌아오라고 우리를 부르는 산길 하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 도종환 ‘사려니 숲길’中
 
숲에 발을 딛는 순간 짙은 안개 너머로 언젠가 이별했던 첫사랑을 우연히 마주칠 것만 같았다. 그리운 그 사람과 다정히 손 잡고 남몰래 걷고 싶은 길. 홀홀히 떠난 제주, 하필이면 비까지 내리던 날의 사려니 숲길.
사실 굳이 비 오는 날을 택해 사려니 숲길에 간 것은 아니었다. 예고도 없이 쏟아진 비였기에 우산조차 준비하지 못했다. 점점 거세지는 빗방울 중 하나를 정수리에 정확히 맞고 나니 ‘대체 이게 무슨 청승인가’ 싶은 생각이 들어 곧 발길을 돌리려고도 했다. 하지만 비 오는 날의 사려니 숲길은 그 모든 청승을 다 감수하고서라도 걷고 싶은 그런 길이었다.
 
‘사려니’는 산(山)을 뜻하는 제주 방언인 ‘솔’에다가 안(內)을 뜻하는 ‘안이’가 붙어 ‘솔아니’로 불려오다가 ‘소래니’, ‘소려니’를 거쳐 ‘사려니’로 바뀌어 붙여진 이름이다. ‘솔’은 ‘신령한 곳’이라는 의미도 품고 있다고 하니 사려니 숲길은 ‘신성한 숲’인 셈이다.
‘이토록 잘 어울리는 이름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비 오는 날의 사려니 숲길은 신비롭고 아름다웠다. 산신령이 있다면 분명히 사려니 숲길에 살고 있을 거란 생각도 들었다. 빗방울을 가득 머금은 나뭇가지에서는 어쩐지 영험한 생명의 기운이 가득 풍겨 오는 것만 같다.
실제로 한라산 아래 남원 쪽 사람들에게 사려니 오름은 ‘신성한 숲’으로 여겨졌다. 멀고 깊은 해발고도 500~600m 중산간에 자리잡고 있어 닿기 어려운 곳이었던 것이다.
옛날에는 제주 목동 테우리들과 사냥하는 사농바치, 숯을 굽거나 버섯을 따는 사람들만이 들어갈 정도로 아주 깊은 숲 속이었다. 가까이 다가가기 어려웠기에 더욱 신비로웠던 숲. 사려니 숲길이 대중적으로 알려진 것은 30여년 전 112번 도로(비자림로)가 놓이면서부터다. 그후 2002년에 이 근방이 유네스코 제주 생물권 보전지역으로 지정됐고 2009년 7월에는 제주시 지정 ‘제주시 숨은 비경 31’에 선정되기도 했다. 원시림의 보존을 위해 비공개로 보호해오던 사려니 숲길이 일반에게 공개된 것은 고작 몇 년 전으로 그리 오래지 않다. 그마저도 일부 공개다. 국유로 보호해야 할 만큼 가치 있는 산림이기 때문이다. 걸음 걸음 신비하게만 느껴지는 탐방로가 더없이 소중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사려니 숲길을 걷는 방법
탐방로에 들어서면 황토길 양쪽으로 펼쳐진 울창한 숲이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뻗어 오른 울창한 숲은 하늘을 뒤덮은지 오래고 뽀얀 안개가 그 아래를 차분하게 채우고 있다. 사람과 동물, 나무와 꽃이 평화롭게 조화를 이룬 사려니 숲길을 걷다 보면 모든 무거웠던 마음들이 가볍게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다.
사려니 숲길은 참 넓고도 깊다. 졸참나무, 서어나무, 산딸나무, 때죽나무 등 무수히 많은 온대 나무들과 숲을 빼곡히 채운 삼나무 편백나무 군락, ‘제주의 신비’라 불리는 물찻오름, 붉은오름, 사려니오름 등 하나하나 언급하기에도 벅찰 정도다. 그 길이가 길기도 참 길다. 제주시 봉개동 절물오름 남쪽 비자림로에서 물찻오름을 지나 서귀포시 남원읍 한남리 사려니오름까지 무려 15㎞에 달한다. 사색을 즐기며 놀멍 쉬멍 가다 보면 반나절이 훌쩍 지나갈 정도이니 숲 보전을 위해 중간 통제된 구간을 제외하더라도 어마어마한 길이다.
사려니 숲길에서 가장 아름다운 구간으로 꼽히는 구간은 비자림로 사려니 숲길 입구에서 붉은오름으로 이어지는 10㎞ 구간이다. 비자림로 탐방 안내소 주차장에서부터 시작한 길은 완만한 내리막과 완만한 오르막이 반복되는 평온한 숲길이다. 평탄하게 이어지는 길이기에 웬만큼 걸어도 숨이 차오르지 않는다.
비 오는 사려니 숲길을 가만히 홀로 걷고 있자니 입구에서 얼핏 본 도종환 시인의 시 ‘사려니 숲길’의 한 구절이 절로 떠오른다.


◈ 사려니 숲길
-주소: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조천읍 사려니 숲길
-전화번호: 064-900-8800
-자가용: 제주시 광양사거리에서 성판악-서귀포 방면 1131번 도로→교래입구 삼거리에서 좌회전→112번 도로로 1.1㎞쯤 가면 도착
-대중교통: 제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교래경유 버스 탑승→물찻오름 입구에 하차
 
◈ 제주시험림 탐방
-사려니 숲길 중 사려니오름으로 향하는 제주시험림은 연중 15일 정도의 행사 기간을 제외하고는 미리 예약해야만 들어갈 수 있다. 신청일 기준 7일 이후부터 2개월 이전까지 사전 예약이 가능하다. 일일 정원은 100명, 동일인이 한 달에 2번 이상 중복 예약할 수 없다.
-탐방예약시간: 오전 9시, 10시, 11시/ 오후 12시, 1시, 2시(숲 해설 제공: 오전 10시, 오후 2시)
-예약처: www.forest.go.kr (휴양·문화>산림/산촌생태>산림생태탐방>제주시험림탐방예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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