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 가격이 그야말로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다. 사상 최고치 경신 이후 연일 상승세다. 5대 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에서 팔려나간 골드바는 지난달 약 66억 원어치에 달했다. 이젠 돌 반지 한 돈(3.75g)이 40만 원을 훌쩍 넘는다. 

세계 통화정책을 좌지우지한 앨런 그린스펀 전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의 일화다. 그가 한 모임에 강연자로 초청됐다. 초청 관계자가 그린스펀에게 강연료로 “달러가 좋을까요, 아니면 유로가 좋을까요?”라고 물었다. 그는 잠시 침묵하더니 짤막하게 “골드”라고 대답했다. 18년 동안 FRB 의장으로 군림하며 ‘달러의 수호자’로 힘써온 그가 금을 선택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했다.

“황금은 인간의 깊숙한 잠재의식 속에 있는 본능을 만족시켜 상징으로 이용하도록 촉구하는 어떤 힘을 갖고 있다” 세계적인 심리학자이자 철학자인 프로이트(1856~1939)의 말이다.

예로부터 금은 영원한 생명을 지닌 신의 상징으로까지 여겨졌다. 금은 권세와 부귀, 그 자체였다. 고대인은 황금을 태양과 동일시했다. 이집트 투탕카멘 왕(재위 기원전 1361~ 1352)의 유명한 황금 마스크는 중량이 무려 10.23㎏이나 된다. 15세기 콜럼버스(1451~1506)의 신대륙 발견도 금밭으로 소문난 인도나 중국으로 가는 뱃길을 열기 위한 항해의 결과였다. 마르코 폴로(1254~1324)는 ‘동방견문록’에서 금·은을 서구에서 가장 인기가 높은 향료·비단보다도 훨씬 더 많이 언급했다. 

19세기는 본격적인 골드러시의 시대였다. 1848년 미국 서부의 캘리포니아에서, 1851년 오스트레일리아의 뉴사우스웨일스에서, 1896년 알래스카에서 수많은 사람이 금광으로 몰려들었다. 1859년에는 전 세계 금 생산이 연간 275톤으로 18세기의 10배가 넘었다. 

우리나라에서도 1930년대 광산업이 60%를 차지할 정도로 산금(山金)이 전국 곳곳에서 생산됐다. 우리나라 지명 중 김제, 금천 등 ‘금(金)’ 자가 들어간 지명은 사금이 많이 나던 곳이다. 

금 채굴은 기나긴 시간과의 싸움이다. 실제로 금광을 발견해서 생산하기까지는 최소 5~7년이 걸린다. 일반적으로 금광에서 채굴하는 금은 산금이다. 산금은 땅속 석영광맥(石英鑛脈, 광물로 이뤄진 긴 맥) 속에 극히 소량 함유된 금광석이다. 

이와 달리 강가나 바다의 모래에 섞여 있는 금을 사금(砂金)이라고 부른다. 사금은 석영광맥이 풍화돼 물에 의해 운반되거나 지하수 속에 포함돼 있던 미량의 금이 석출된 것이다. 사금은 금 함량이 99%가 나오는 경우가 없다. 다른 이물질이 섞여 있어 제련 과정을 거쳐야 한다. 

금은 금광에서 많이 나는가? 금은 금광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놀랍게도 금 대부분은 육지가 아닌 해저 광맥에 묻혀 있다. 지구의 대양에는 엄청난 양의 금이 떠다니고 있다. 그 양은 인류가 그동안 금광에서 발견해 캐낸 금을 전부 합친 것보다도 약 200배나 많다. 

바닷물에는 금 외에도 다른 많은 광물이 녹아 있다. 바닷물 1㎦에는 염화나트륨(소금) 7260만 톤, 염화마그네슘 1015톤, 브롬 17만100톤, 은 25톤, 금 14톤 등이 포함돼 있다. 하지만 이 광물 중에서 염화나트륨과 마그네슘만이 상업적 목적에 의해 대량으로 바닷물에서 추출되고 있다.

금의 가치는 시대마다 달랐다. 중세 아프리카 사람들은 금보다 소금을 더 귀하게 여겼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금과 소금의 가치가 거의 비슷했다. 로마 시대에는 군인의 급료를 소금으로 지불했다. 남아메리카의 잉카 사람들은 금을 장식용 외에도 식기나 빗 또는 못으로 사용했다. 옛날 이집트에서는 은이 금보다 더 가치가 있었다.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 사람은 빈손으로 태어나 빈손으로 간다. 왕릉에 묻힌 수많은 금관도 결국 박물관에 전시될 뿐이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는 자신의 마음에 달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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