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대배
임대배

“아휴, 힘들어. 애들이 정말 말귀를 못 알아들어.”

딸애는 가끔 이런 푸념을 늘어놓곤 한다. 일주일에 한 번, 미술학원 강의가 있는 날이면 진이 빠진다고 엄살이다. 가르치는 일은 아무래도 자기 적성에 맞지 않는 것 같단다. 학원에서 강사로 어느 정도 경험을 쌓고 나면 언젠가는 미술학원을 직접 운영할 수도 있지 않을까 했던 내 기대는 헛된 꿈이 되고 말았다.

그게 싫으면 공부를 좀 더 해서 교수가 되는 건 어떻겠냐고 딸의 의중을 떠본 적도 있다. 미국에서 오랫동안 유학을 했으니 국내 박사 과정을 밟으면서 작품 활동을 하다 보면 대학에서 강의할 기회도 오지 않겠느냐고 설득했다. 하지만 딸은 요지부동이다. 교수라는 직업도 별로 끌리지 않는다고 했다.

딸의 직업은 아트 디렉터. 현재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다. 말이 좋아 프리랜서지 불러주는 곳이 없으면 곧바로 실업자가 되는 불안정한 상태에 놓여 있는 셈이다. 그나마 규칙적으로 하는 일이 미술학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건데, 딸애는 그 일이 영 마뜩잖은가 보다. 광고회사에서 프로젝트를 맡아 일할 땐 시쳇말로 ‘영혼을 갈아 넣어’ 밤샘 작업을 해도 힘든 줄 모르겠는데 가르치는 일은 도통 재미가 없다는 것이다.

사람의 생각이나 적성은 다 다르게 마련이니 내 마음 같지 않다고 해서 딸에게 이래라저래라 잔소리를 늘어놓을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과년한 딸이 결혼에는 뜻이 없는 데다 안정된 직장마저 없으니 부모로서는 내심 걱정스럽기도 하다. 그런 나에게 큰 위안이 되는 말을 하나 알게 됐다. 바로 ‘황금 씨앗(golden seed)’이다.

‘삶이 던지는 질문은 언제나 같다’라는 책에서 경영 사상가 찰스 핸디는 우리 모두에게 ‘황금 씨앗’이란 게 있다고 말한다. 황금 씨앗이란 어떤 사람이 갖고 있는 특별한 재능이나 능력, 또는 적성을 뜻한다. 사람은 누구든 자신의 황금 씨앗을 찾아낸 후 그것이 잘 싹틀 수 있도록 적절히 비료를 주고 가꾼다면 언젠가는 한 분야에서 최고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강점을 발견하고 그것에 집중하라! 이는 비단 현대 긍정심리학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관점이 아니다. 일찍이 소크라테스는 “모든 면에서 자신의 적성과 능력에 따라 행하는 것은 좋은 원칙”이라고 말했다. 아리스토텔레스 또한 ‘좋은 삶’이란 자신의 강점을 개발하고 잠재력을 실현하며 타고난 본성을 구현하는 삶이라고 주장했다.

고목에도 싹은 트는 걸까. 황금 씨앗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왠지 가슴이 뜨거워짐을 느꼈다. 그것은 말하자면 뒤늦게나마 내 안의 황금 씨앗을 잘 일궈내야겠다는 자각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크든 작든 그 나름의 잠재력을 갖고 있다는 것이 평소 내 생각인데, 황금 씨앗이라는 말이 그러한 믿음을 강화해 준 셈이다.

어떤 단어나 개념 속에는 때로 강력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 우리가 만일 진지하게, 그 개념을 마음속 깊이 받아들이기로 한다면 그것은 의외로 큰 힘을 발휘할 수도 있다. 예전에 몰랐던 새로운 관념은 사고방식에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생각의 변화를 일으킬 수도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그로 인해 우리의 행동이 바뀔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대부분 자신의 황금 씨앗이 무엇인지를 알아내지 못한 채 한평생을 살아가는 게 아닌가 싶다. 솔직히 나는 PD로서 30년 이상 방송 프로그램을 제작하면서도 그 일에서는 별다른 기쁨이나 보람을 느끼지 못했다. 그보다는 대학에서, 별로 돈 안 되는 시간강사 신분이었지만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이 백배는 더 재미있었다. 지금 결혼 이민자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삶은 내 안의 황금 씨앗, 즉 ‘가장 나다운 것’을 발견해 가는 과정인지도 모르겠다. 자식의 선택이 내 뜻과 다르다고 해서 서운해하거나 조바심 낼 일은 아니다. 오히려 자신만의 황금 씨앗을 발견하고 잘 키워낼 수 있도록 자식을 믿고 격려하며 기다려 주는 것, 그게 순리일 듯하다.

 

 

임 대 배 l 전 KBS 프로듀서(TV쇼 진품명품, 아침마당, 인간극장 등 연출). 전 홍익대 강사. 현 서울 금천구 가족센터 한국어강사. 저서 ‘책을 짊어진 당나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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