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종찬의 사람 향기 나는 식탁]

 

 

바지락

갯벌을 지나면 조개가 ‘바지락 바지락’ 소리를 내며 밟힌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서해안을 비롯해 우리나라의 전 연안에 서식한다. 주로 모래와 펄이 섞인 혼합 갯벌에 양식장이 운영되고 있다. 이동이 적은 어패류라서 1912년부터 양식에 성공했다. 칼슘과 단백질, 비타민 B 등의 영양소가 풍부하며 한국인이 가장 많이 먹는 조개다. 핵산이 풍부한 바지락으로 국물을 내면 감칠맛이 뛰어나고, 개운한 맛을 낼 수 있어 다양한 요리에 들어간다. 제철인 봄에는 살이 통통하고 맛도 달다. 독소가 생성되는 산란기인 7~8월에는 날로 먹는 것은 삼가야 한다. 

 

배종찬
배종찬

산과 들에서 꽃놀이가 시작되는 3~4월이면 모래펄에서도 꽃놀이가 시작됩니다. 바지락이 겨우내 바닥에 숨겼던 제 몸을 드러냅니다. 대파 한 줌, 청양고추 한 개, 통통한 봄 바지락만 있으면 준비 끝입니다. 감칠맛 나는 조갯국 한 모금에 어제 마신 술은 물론이고 오늘 술도 깰 것 같은 기분이지요. 

매년 봄 선산이 있는 전북 고창에 갑니다. 힘든 벌초는 후다닥 끝내고 꼭 들르는 곳이 선운산자락 바다 쪽인 심원면 하전 마을입니다. 모래와 펄이 적당히 섞여 있어 전국 바지락 수확량의 40%나 담당합니다. 고종사촌인 김선백 형님도 여기서 바지락 양식을 했습니다. 

품질 좋은 바지락은 간만 차가 있는 먼바다에서 납니다. 대부분의 양식장은 트랙터로 한 시간 정도를 가야 합니다. 제가 다니던 때는 트랙터는 없었고 경운기를 탔지요. 덜컹거리는 경운기에 엉덩이는 물론이고 온몸이 몸살이 납니다. 망망대해를 향해 하염없이 가다 보면 ‘이러다 중국까지 가는 것 아닐까’ 하는 걱정이 될 정도였죠. 노련한 기사인 형님은 이럴 때 꿀맛 같은 휴식을 줍니다. 가던 길을 멈추고 전날 걸어 둔 통발이 있는 조개무덤으로 향합니다. 

파닥거리는 짱뚱어와 이름 모를 생선 몇 마리가 어서 오라며 손짓하고 있습니다. 칼 한 자루와 소주 한 병이 어디선가 나타납니다. 역시 계획이 다 있었던 겁니다. 물 때 시간을 생각해 바쁘게 짱뚱어를 손질하고 소주를 나눕니다. 모두의 건강을 위해 건배하고 초장을 가득 찍어 회 한 점을 입에 넣습니다.

그 순간 맙소사, ‘우르르 쾅쾅’ 요란한 천둥소리가 납니다. 몇백 미터 앞에 먹구름이 우리에게 달려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놈의 짱뚱어는 왜 이리도 맛납니까? 달달하게 녹는 부드러운 식감이 자리를 못 뜨게 합니다. 회 한 점에 소주 한 잔을 부지런히 들이켜는 순간 매정한 소나기가 뿌려 댑니다. 

피할 수 없으니 즐기기로 돌입합니다. 바다에서 맞는 빗방울은 돌멩이가 떨어지나 싶을 정도로 정말 아픕니다. 하지만 귀한 안주가 다칠세라 다섯 남자가 등짝을 방패 삼아 지켜냅니다. 바쁜 와중에도 건배는 쉬지 않습니다. 술잔은 채우지 않아도 항상 그득하게 리필됩니다. 빗물 덕분이죠. 안주도 맛있고, 싱거워진 소주도 맛있고, 아프고 추운데도 웃음만 나옵니다. 십여 분의 사투 후 먹구름이 수평선 위로 곱게 펼쳐진 무지개를 선물로 주네요. 바다 위에서 먹은 조갯국은 비 맞은 몸을 따뜻하게 녹여 주고요. 이보다 아름다운 풍경이 있었을까요. 

일행의 가이드가 돼 주신 형님은 고모부 임종 후 귀어해 오랜 기간 그렇게 바지락을 키워왔습니다. 하지만 몇 해 전 삶의 터전이던 바다를 떠났습니다. 힘든 노동을 감당할 젊은 사람이 부족했고, 국산 종패가 구하기 어려워진 것이 큰 이유였습니다. 

게다가 인근에서 이뤄진 간척사업으로 갯벌이 황폐해져 바지락 수확량이 줄어 다른 어민들도 떠나는 실정이라고 합니다. 새만금 방조제는 길이 33.9㎞로 기네스북에 오른 자랑스러운 국책사업입니다. 여의도 면적의 33배 크기의 국토 면적을 확장했지요. 하지만 안타깝게도 인공적인 구조물로 인해 수만 년을 이어오던 모래 흐름이 멈춰 바다와 갯벌이 없어지고 있습니다. 생겨난 땅보다 더 넓은 바다가 사라지게 됐습니다. 노을에 물든 갯벌을 잃었고, 조개를 캐던 어민도 잃었습니다. 바다와 함께한 멋진 추억도 더는 만들 수 없을 것 같네요. 

추억은 맛으로 기억됩니다. 그 안에는 풍경도 있고 함께했던 사람도 있습니다. 삶의 터전이며 추억을 만들어주는 곳들이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마구 훼손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저에게 서해의 바다는 조갯국으로 기억됩니다. 바지락을 가득 싣고 반갑게 손 흔드는 형님의 모습을 다시 보고 싶네요.

 

배 종 찬 l 20대 후반에 차린 어묵전문점은 3년여 뒤 문을 닫았다. 어머니가 운영하던 한식집 토속정 운영에 합류해 18년째 손님을 맞고 있다. 주말에는 홍보마케팅 대표로 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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