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

고경희 기자
고경희 기자

세계 전자 관련 회사 등이 모여 신기술과 신제품을 선보이는 박람회 ‘CES 2024’에서 전기차 무선충전의 기술이 엿보였다. 국내외 전기차 및 충전설비 업체들은 ‘전기차 무선충전 솔루션’을 앞다퉈 내놨다. 이들은 “앞으로 더 빠르고 간편하게 전기차를 충전할 수 있다”고 말한다. 

대표적으로 주차장 바닥에 송신부 충전용 코일을 매립하고 차량에는 수신부 코일을 부착해 무선으로 충전하는 방식이다. 스마트폰을 무선충전 패드에 올려 충전하듯 하는 것이다.

정부도 이미 전기차 무선충전기 제품인증, 설치장소 규제를 완화해 무선충전기 상용화를 유도하고 있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지난해 6월 30일 관련 4개 고시를 일괄 개정했다. 이에 따라 전기차용 11㎾ 이하 무선충전기기의 경우 전파법에 따른 전파응용설비 허가 없이 적합성평가 인증을 받은 동일모델 제품을 누구나 원하는 장소에 설치, 사용할 수 있게 됐다.

환경부도 지난해 12월 전기설비 용량이 부족해서 충전기 설치가 어려운 노후아파트 등에는 전력분배형을, 충전수요가 급증한 곳에는 이동형·무선형 등 신기술 충전기를 보급한다는 계획을 밝혔다. 신축 공동주택의 충전기 의무 설치 비율은 현행 5%에서 2025년 10%로 높이겠다는 구상도 덧붙였다.

아파트들은 지난 2년간 경쟁하듯 전기차 충전시설을 확대 설치했다. 이것들은 물론 유선 충전기다. 정부가 2022년부터 신축건물 전체 주차대수의 5% 이상, 2023년부터는 기존 100세대 이상 아파트나 대형마트 등에도 2% 이상에 전기차 충전기 설치를 의무화한 결과다. 아파트가 가장 많은 경기도는 500세대 이상 아파트에 충전기 설치를 의무화한 게 2017년 6월이었다.

CES의 새 기술 소식과 국내 아파트 상황을 겹쳐 보면 뭔가 어색하다. 왜 한국만 이렇게 급하게 고정식 유선 충전기를 설치하게 했을까. 다른 나라와 비교하면 의문이 더 커진다. 영국 정도가 모든 신축 주택에 1개 이상의 충전기를 설치하도록 하고 있다. 미국 에너지부는 주택이나 아파트의 충전기 설치에 주의할 점과 정부 지원을 소개할 뿐 설치 의무를 부과하지는 않는다. 단독주택이 많은 미국은 아파트의 충전기 설치가 부진해지자 한 스타트업은 야간에 어디서든 충전할 수 있는 이동식 배터리를 선보였다. 충전기가 차에 다가가는 등 다양한 새로운 서비스가 생겨나고 있다. 

한국 정부가 설치를 의무화한 전기차 충전기는 표준화도 되지 않아 앞으로 어떻게 바뀔지 모르는 물건이다. 충전기 전압이나 전류에 대한 기준이 일원화돼 있지 않아 제조사별로 기준이 제각각이고 통신 기술도 달라 충전 오류가 발생하고 충전 속도를 조절하기도 어렵다는 게 전문가의 우려다. 한국아파트신문은 지난해 2월 ‘전기차 충전기, 국제표준 나오면 새로 바꿔야 하나?’라는 기사를 통해 이 문제를 지적한 바 있다. 산업통상자원부 국가기술표준원은 2022년 12월 한국산업표준을 고시하면서 국제표준 개발 상황에 따라 국내 표준의 개정 여부를 검토하겠다고 했다. 

아파트 관리현장에서는 새 국제표준이 나오면 현재 충전기를 모두 교체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우려한다. 모 관리사무소장은 “충전기 화재 우려, 주차면수 갈등 같은 현실적인 문제를 고려하지 않고 충전기를 몇 퍼센트 설치하라고 법령으로 강제하는 것이 문제”라고 일침을 놓았다. 수년 내 무선충전이 쉬워지면 아파트 입주민은 “새것으로 바꿔달라”고 요청할 게 뻔하다. 아파트마다 정부의 의무화로 기껏 깔아놓은 유선 충전기를 돈을 들여 뜯어내고 무선충전기를 새로 깔아야 할 수도 있다.

각종 의무화 조치 등 공동주택 정책을 보면 정부가 아파트를 말단 행정기관쯤으로 보는 게 아닌가 싶을 때가 많다. 전기차 충전기의 경우처럼 정부가 아파트를 정책의 시험대로 활용하는구나 싶을 때도 있다. 이러려고 정부가 각종 법규와 감사, 지원금으로 ‘말 잘 듣는 아파트 관리사무소’를 차근차근 만들어온 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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