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먹을 잘 쓰는 의사가 등장해 화제다. 순천향대 천안병원 소아청소년과 의사로 근무 중인 ‘의사 복서’ 서려경(32) 교수다. 서려경은 프로 전적 7승(5KO) 1무의 무패 행진을 질주하고 있다. 9일 여성국제복싱협회(WIBA) 미니멈급 세계 타이틀매치 전초전에서 태국 선수를 3라운드 15초 만에 화끈한 TKO 승으로 제압했다. 

복싱은 한때 최고의 인기 스포츠였다. 1970년대 세계헤비급 타이틀매치는 그 시대 최고의 볼거리였다.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쏜다’는 무하마드 알리, ‘핵주먹’ 조지 포먼, ‘인간 탱크’ 조 프레이저가 벌이는 3각 경쟁은 지구촌을 달궜다. 

세계 챔피언은 개인의 영광을 넘어 ‘국가적 경사’였다. 세계 챔피언이 탄생하면 김포공항에서 서울시청 앞까지 카퍼레이드를 벌였다. 우리나라는 1989~1991년 연간 5~6개씩의 챔피언 벨트를 유지할 정도로 복싱 강국이었다. 

역대 대한민국 철권(鐵拳)들은 천하를 호령했다. 홍수환, 문성길, 이열우, 최희용 등은 두 체급 챔프에 오르기도 했다.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 대한 국민 만세!.” 홍수환이 1977년 11월 적진 파나마에서 오뚜기처럼 일어나 카라스키야를 4전 5기 끝에 때려눕히고 던진 이 말은 전국적인 유행어가 됐다. 이인영은 2003년 사상 첫 여성 챔피언에 오르며 한국 여자 프로복싱의 신천지를 열었다. 

세계 정상의 길은 참혹하기도 했다. 1982년 세계 챔피언에 도전했던 김득구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레이 맨시니(미국)의 주먹을 맞고 쓰러져 끝내 일어나지 못했다. 최요삼도 2007년 크리스마스 때 헤리 아몰(인도네시아)을 상대로 1차 방어전을 치르다 뇌사상태에 빠져 끝내 깨어나지 못했다. 

우리나라 프로 복싱사는 19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서울 장충체육관은 국내 스포츠 경기의 요람이었다. 1966년 6월 25일 밤 9시 장충체육관. 이곳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세계 프로복싱 챔피언이 탄생했다. 김기수(1939~1997)는 50년 한국 복싱사에 한 획을 그었다. 김기수는 챔피언 니노 벤베누티(이탈리아)와 일진일퇴의 격렬한 공방전을 벌였다. 급기야 15라운드의 최종 라운드를 마치고 2-1 판정승으로 WBA(세계복싱협회) 주니어 미들급 챔피언에 등극했다. 김기수는 승리 후 감격에 겨워 눈물을 연신 흘렸다. 관중의 환호에 답하고는 곧장 대통령이 있는 귀빈석으로 달려갔다. 박정희 대통령은 챔피언 벨트를 직접 그의 허리에 감아주며 역사적인 승리를 축하해줬다. 김기수는 1969년 9월 링을 떠나기 전까지 아마 전적 87승 1패, 프로 전적 45승 2무 2패의 화려한 대기록을 남겼다. 

함경남도 북청 태생인 김기수는 1957년 18세 때 제3회 전국학생복싱선수권대회(라이트웰터급)에서 국가대표 조대희를 꺾으면서 복싱계를 왈칵 뒤집어놓았다. 이듬해인 1958년 도쿄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따는 등 상승가도를 달렸다. 그러던 중 1960년 로마올림픽 준준결승에서 홈링의 복병 니노 벤베누티에게 판정패를 당하며 쓰라린 좌절을 맛봤다. 김기수 아마복싱의 유일한 패배가 바로 이 경기였다. 이탈리아의 복싱 영웅 벤베누티는 이 대회에서 웰터급 금메달을 따내며 복싱 최우수 선수로 선정됐다. 

김기수는 한국인 첫 세계 챔피언 도전자일까? 그렇지는 않다. 그보다 앞서 챔프에 도전한 사람이 있다. 1960년대 ‘돌주먹’으로 이름을 날렸던 서강일이다. 서강일은 1965년 12월 한국인 최초로 필리핀 마닐라에서 벌어진 WBA 주니어 라이트급 세계타이틀전에 도전했다. 결국 홈링의 텃세를 넘지 못하고 불행히도 아까운 판정패를 당했다. 챔피언이었던 플래시 엘로르데(필리핀)는 오른쪽 눈 밑과 눈썹 위 상처로 고전했으나 홈링의 이점을 살려 예상 밖의 심판 전원일치 판정승을 거뒀다. 필리핀 언론조차 서 선수의 승리가 아니면 무승부 경기라며 대서특필했다. 이 경기가 한국 프로복싱 역사상 최초의 세계타이틀매치다. 

서려경이 세계챔프에 올라 선배 챔프들처럼 예전의 감흥을 불러올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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