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현 기자
박상현 기자

“그동안 자부심을 느끼고 주택관리사로 보람있게 일했는데, 이제는 아파트를 쳐다보기도 싫네요. 그래서 아파트 관리사무소장을 그만뒀습니다.”

평소 모범적인 아파트 관리를 고민하고 기자에게 조언도 많이 해주던 경기 고양시 모 아파트 A소장이 24일 전해준 소식에 가슴이 철렁했다. 이 아파트에서 10개월 일한 그가 자발적으로 그만둔 것 같지 않았다.

그는 지난 3월 소송에 휘말렸다고 한다. 전기차를 보유한 동대표 B씨는 전임 소장과 합의해 매달 3만 원을 관리사무소에 내는 조건으로 몰래 아파트 주차장의 공용 전기로 차량을 충전해왔다. 아파트에 전기차 충전시설이 있는데도 비용을 줄일 생각에 두 사람이 합의했던 것 같았다. 이를 알게 된 입대의가 공용 전기 사용 금지를 의결했다. A소장이 입대의 회의 결과를 게시판에 걸자 B씨가 A소장을 명예훼손으로 고발했다. B씨는 “새로 온 A소장이 관리비를 많이 받으려고 한다”고 몰아붙였다고 한다. 

소송 중 A소장은 입주민 C씨로부터 심한 폭언을 들었다. ‘1층 승강기 버튼이 고장났으니 승강기 전체를 정지시키라’는 말에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A소장은 “외부 버튼의 단순 고장이어서 안전에 문제가 없으며 당분간 2층에서 승강기를 이용할 수 있고 고층에 사는 입주민이 불편할 수 있어 승강기를 정지시킬 필요는 없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C씨는 “당신이 무슨 소장이냐. 당장 그만두게 하겠다”며 욕을 해댔다고 한다.

입주민 갑질에 유능한 관리직원 떠나면 누구 손해일까

두 사건을 겪으며 괴로워하던 A소장은 최근 1심 재판에서 무죄 선고가 나오자 사직서를 던지고 시골로 내려갔다. A소장은 주택관리사면서도 아파트 전기분야에 능통했다. 대기업에서 전기기사로 10년간 일했던 경력 덕분이었다. A소장은 아파트 가는 곳마다 전기 설비 점검과 교체를 통해 불필요하게 많이 나오는 전기요금을 줄여줘 입주민들의 칭찬이 자자했다. “소장 근무 15년이 다 되도록 입주민과 충돌 한번 없이 지내왔다”며 뿌듯해했던 그였다. 그가 떠난 아파트는 더 행복해졌을까, 더 팍팍해졌을까. 

지난 4월 술에 취한 입주민이 경비실에서 경비원과 대화를 나누고 있던 D소장에게 욕설을 퍼붓고 밀어 전치 3주의 상해를 입힌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피해자 D소장은 “가해자는 일면식도 없던 입주민인데 거짓 소문을 듣고 와서 이런 일을 벌인 것 같다”고 토로했다.

본지가 지난해 대한주택관리사협회와 함께 전국 주택관리사 413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한 결과 부당대우를 직접 경험했다는 응답이 88%(363명)에 달했다. 과반이 넘는 256명(62%)이 입주민의 폭언·폭력을 겪었고 부당해고도 70명(17%)이나 됐다. 입주민, 입대의 회장이나 임원의 갑질 등도 있었다. 

지난해 2월 아파트 입대의와 입주자등은 소장에게 폭행·협박 등 위력을 사용해 업무를 방해하는 것을 금지한다는 내용의 공동주택관리법 제65조가 시행됐다. 그러나 현재까지도 관리현장 곳곳에서 갑질 피해 소리가 이어진다. 문제가 생겨도 제65조가 적용되는 사례는 흔치 않다.

아파트 입주민은 자신의 아파트를 명품으로 만드는 것은 결국 입주민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입주민이 소장과 직원에게 건네는 따뜻한 말 한마디가 이들을 움직여 아파트를 가꿔준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입주민의 갑질에 유능한 소장과 직원이 아파트를 등지면 더 큰 손해가 입주민에게 돌아가고 만다.

이달 초 서울 모 아파트 E경비원이 신문사로 전화를 걸어왔다. “입주민으로부터 폭언을 들었는데 제보하고 싶다”고 했다. 입주민 F씨가 아파트 단지 한쪽에 파지를 모아두고 있어 그에게 치워달라고 말했다가 며칠 동안 F씨의 욕설에 시달렸다는 것. 고령의 E씨는 상황을 설명하면서 “비참하고 억울하다”는 표현을 몇 차례 했다. E씨는 그러나 설명을 다 마치지 못했다. 그는 “고용 문제 때문에 제보를 잠시 뒤로 미뤄야겠다”면서 말을 흐리더니 전화를 끊었다. 넉넉지 못한 일자리조차 졸지에 날아갈까 두려워 억울한 처사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더 억울한 사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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